기자명 강동헌 편집장 (kaaangs10@skkuw.com)

몇 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은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유로운 두 손을 얻었다. 자유로워진 두 손은 도구의 개발을 가능케 했고 원시 공동체 생활로 공동 노동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증대되었다. 공동 노동을 하면서 정보를 정교하게 전달해야 할 필요에 의해 표정이나 몸짓, 손짓 등의 수단을 통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앞을 잘 볼 수 없는 야간이나 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에서는 비효율적이었다.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통한 대화의 효용이 커지고 구음기관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말소리를 통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언어의 발명으로 우리 조상의 두뇌는 급속도로 발달했다. 수렵과 채집 생활에서의 정보를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는 대상에 대한 명명(命名)을 통해 동일한 대상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하늘이 맑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늘이 맑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구에 대한 정보 전달이 가능해졌고 대상에 대한 정보 판단, 나아가 가치 판단이 가능해졌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대화가 가능했고 이에 더불어 종교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를 매개로 사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후 언어의 발전은 학문의 눈부신 발전을 이끌었다. 학문의 발전은 일련의 언어 명제의 발견이었다.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은 “사과가 지구를 끌어당긴다”는 명제의 발견이다. 언어가 정교화되면서 명명할 수 있는 대상의 폭이 넓어지고 현상에 대한 세분화된 분석이 가능해졌다. 부유하는 현상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 틀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언어를 ‘아는 만큼만’ 사유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신문사 생활을 하다보면 재밌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신문이 월요일에 발간되기 위해서는 기자들 전체가 모여 기삿거리가 되는 기획에 대한 피드백 회의를 거친다. 이때, 기자들의 피드백은 저마다의 언어로 대변된다. 경제학을 전공한 기자는 경제의 언어로 법을 전공한 기자는 법의 언어로 다른 영역의 사안에 대해 설명한다. 개인의 사고는 그가 알고 있는 언어 체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오늘날 한국사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체계로만 사회현상을 해석한다. 올림픽만 해도 그렇다. 올림픽이 실제로 거뒀던 성과와 손실에 대해 집중하지 않고 정치적 프레임만 난무할 뿐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언어 속에 현상에 대한 올바른 언어 선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언어체계가 우리의 사유과정을 잘못 이끌어가는 문제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부유하는 현상에 대해 잘못된 사유체계를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언어체계도 배척돼야 할까. 중세 시대 사제들에 의한 문자 통제는 학문의 암흑기를 초래했고 유럽 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인간이기에 현상에 대한 언어 선택의 과정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상속에나마 현상에 대한 알맞은 단어는 존재한다. 우리 언어는 수많은 단어를 지니고 있다. 알맞은 언어 선택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