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예나 (yena0710@naver.com)

“MBC뉴스 왕종명입니다.”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도 어딘가 깨어있을 권력의 부정을 감시하고 사건사고를 전달하는 기자 왕종명(통계 93) 동문을 만났다.

사진 | 박영선 기자
사진 | 박영선 기자

불의 보면 울컥하던 청년,
원칙 따라 보도하는 기자로
MBC 신뢰도 회복이 현재 목표

불량친구들, 인생을 바꾸다
“중3 때까지는 철저한 마마보이였어요.” 왕 동문의 아버지는 건설업계에 종사하시느라 집을 자주 비우셨다. 그에게 있어 그런 아버지는 한 번씩 초코파이를 사 오는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굉장히 엄하게 키웠어요. 아버지 밑에서 교육 못 받고 컸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성적이 떨어지거나 버릇없이 굴면 두드려 맞고는 했죠.” 그런 그는 고2 때 반장을 맡으며 그의 인생을 바꾼 친구들을 만났다. “선생님이 소위 불량한, 껄렁껄렁하다는 애들을 관리하라고 저를 붙여줬는데, 도리어 친해져 버렸죠. 그러면서 저항, 반항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마 사춘기도 그때 시작한 것 같아요. 성적은 점점 떨어졌고, 반항심은 커졌죠.” 하지만 그에게는 ‘그놈들’이 아직도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제 인생, 인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친구들이에요. 당시 어머니는 친구 잘못 만나면 인생이 망가진다며, 그놈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근데 이 친구들을 만나고 형성됐던 저만의 인성이 기자 준비를 하고 기자 생활을 하는 데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처음부터 기자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무엇을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다만 신문방송학과라는 이름이 멋있어 대학 1지망으로 넣었죠. 하지만 그것도 떨어져 2지망인 통계학과에 가게 됐어요.” 이랬던 그가 기자를 꿈꾸게 된 건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다. “주변에 PD, 기자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책을 봤는데 내용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결정적으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형성된 인성, 불의를 보면 울컥하는 성격이 영향을 줬어요. ‘여러모로 직업적으로 나와 맞지 않나’하는 생각에 기자 준비를 했죠.”

통계학과였던 그가 기자 준비를 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언론고시반을 들어가려 했는데 신방과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텃세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는 언론고시반에 들어가지 않고 독학의 길을 걸었다. 4학년이 돼서야 스터디를 했지만 ‘빽’도 연줄도 없었던 그는 자신의 실력만 믿고 공부에 매진했다. 기자가 되기 위해 그는 인생에서 후회 없을 정도로 원 없이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대학 1학년 때는 동아리 ‘못갖춘마디’를 하며 통기타에 완전히 빠졌었어요.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님이 ‘어휴, 너 오랜만이다’라고 하시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3, 4학년 때는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4학년 때는 도서관에 맨 먼저 가서 맨 마지막에 나와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기도 했죠.”

진정한 기자가 되어가다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던 그였지만 계속되는 낙방에 좌절한 적도 있다. “여러 언론사의 시험을 치르며 최종면접까지 몇 군데 가다 보니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었어요. 그런데 아홉 번, 열 번, 횟수가 길어질수록 그 믿음이 조금씩 줄어들며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열두 번째 떨어지니 ‘아닌가? 나 자신에 대해 오만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마음을 비우고 친 열세 번째 시험으로 그는 드디어 세계일보 기자가 됐다. 여러 번의 낙방 끝에 합격한 터라 합격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대성로를 뛰어갈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 하지만 입사 후 그는 곧 언론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권력의 전화 한 통에 기사의 분량이 축소되고, 1면에 나가야 할 기사가 사회면 사이드에 나가는 것을 경험했어요.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자 회의감을 많이 느꼈죠. ‘이 직업을 그만두거나 이 회사를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일보에서의 2년 근무 후 그는 지금 몸담고 있는 MBC로 이직하게 됐다. “사실 방송기자를 원한 건 아니었어요. 글 쓰는 게 좋아 신문기자로 일하고 싶었는데, 당시 아나운서를 준비하던 아내가 MBC에 지원하며 제 지원서도 함께 내버렸죠. 그러다 덜컥 붙어버렸어요.” 그는 긴 고민 끝에 이직을 결심했다. 기사로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공감과 파급력을 불러일으켜 불의를 바로잡는 기자가 되길 갈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회사 선배들의 조언도 한몫했다. “선배들은 고민하는 저에게 ‘미쳤냐, 너? 뭘 고민해. 네가 가지고 있던 고민이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는 곳이 MBC야’라고 했어요. 저 또한 당시 언론사 중 가장 자유롭고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이 MBC라고 믿고 이직을 결심했죠.”
 
수고했다, 왕 기자
그는 MBC에서 보도했던 뉴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2007년 보도된 ‘카지노행 여권, 내국인 북적’ 기사를 꼽았다. 취재를 다 마치고 문제가 되는 회사 측의 반론까지 받아낸 상태였지만 방송 하루 전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종명아, 너 혹시 카지노 취재하고 있냐?” 삼촌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삼촌은 그에게 굉장히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기자를 준비하는 시절 방 한 칸을 내주고 용돈을 손에 쥐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가 준비하던 기사의 문제 회사는 그런 삼촌이 실직 생활 끝에 2년 여간 근무하던 곳이었다. “삼촌이 전화로 사정을 했어요. ‘너 보도하는 순간 우리 회사 망한다’고. 사촌동생들이 대학생, 고등학생이었기에 당시 저는 더욱더 고민에 빠졌었죠. 조금 뒤 아버지에게서도 전화가 왔어요. ‘너 미쳤냐. 네가 누구 덕분에 기자가 됐는데 그걸 보도하려고 하냐’고 하셨죠.” 망설이는 그에게 보도국장은 “보도를 하겠다면 하고 안 해도 문제 삼지 않겠다”며 결정권을 넘겨줬다. “선배들, 후배들에게 물어봤을 때 다수가 보도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이것을 보도해서 회사가 문을 닫으면 정의를 바로 세울 수는 있지만 제 가족뿐 아니라 정직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거였죠.” 그는 앞으로 기자 생활을 하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물러설 것인가 생각했다. 결론은 ‘아니다. 나는 내 원칙대로, 기획했던 대로 보도할 것이다’였다. 가족이라 보도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더더욱 개입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긴 고민 끝에 결국 방송을 내보냈다. 보도가 나간 뒤 회사는 망했고 그의 삼촌은 다시 실직자가 됐다. “그런데 보도가 나간 다음에 삼촌한테 문자가 왔어요. ‘수고했다, 왕 기자’라고요. 마음이 굉장히 안 좋았죠. 그러고 나서 동료들한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 사연이 제 기억에 오래 남고 기자 생활을 하며 물러서지 않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주어진 펜, 어떻게 쓸 것인가
1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던 그는 MBC 언론의 추락을 겪으며 실망감을 느꼈다. “정권에 빌붙은 회사의 경영진들도 기자였어요. 자기가 예전에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권력과 결탁해 언론을 통제했던 거죠. 결국 기자는 나한테 주어진 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 펜이 남을 찌르라고 있는 건데 내 눈, 내 동료의 눈을 찌를 수 있는 거죠.” 그는 MBC 언론의 정상화를 위해 기자협회장으로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른바 리더는 ‘해고 1순위’가 되곤 해요. 기자협회장을 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죠. 작년 한해 동안은 휴가도 못 갈 정도로 바빴어요. 올해 제 밑에 있는 후배한테 회장직을 넘겨줬는데 제대한 느낌이 들었어요. 홀가분했죠. 그러고 나서는 긴장이 풀리니 한 1주일 동안 아팠어요.” 이런 그는 파업 종료에 대한 소감도 남달랐다. “제가 앞에서 나섰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우리가 모두 한 줄로 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을 때 제가 그들을 대표해 외쳤을 뿐이죠. 다만 사람들이 저를 믿어주었고 힘들 때는 서로 토닥여주면서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게 함께 손을 잡고 왔어요. 그래서 조직의 정상화라는 것을 얻어냈고, 추락한 뉴스에 대한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안에서 제가 뭐라도 작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제 스스로한테 좀 대견해요.”

파업이 종료된 지 4개월쯤 된 지금, 차이를 느끼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완전히 변했죠. 사람이 변하면 뉴스도 변해요.” 하지만 그는 MBC가 정상화됐단 이유만으로 시청자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라 전했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좋은 기사로서 보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그에게 기자로서의 목표는 MBC가 다시 가장 믿을 수 있는 언론이 되는 것이다.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MBC 뉴스가 신뢰도에서 1위를 되찾는 것을 꼭 다시 보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기사는 가장 친절하게,
문제 제기는 가장 상식적으로

그는 지난 20여 년간의 언론인 생활에서 신문기자, 방송기자, 앵커를 모두 경험했다. 언론인으로서 오랜 경력 속에는 기자로서의 뚜렷한 가치관이 묻어났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기자가 똑똑한 척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기사는 가장 친절해야 된다, 문제 제기는 가장 상식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복잡한 사안을 취재하더라도 제가 어려워야지, 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어려우면 안돼요.” 그는 언론이 ‘거창한 정의’보다는 상식이라고 전했다. 상식으로 판단했을 때 나쁜 사람, 위험한 일이 곧 기사가 되며, 이를 바탕으로 알아듣기 쉬운 뉴스를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덧붙여 그는 기자로서의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 ‘건전한 상식,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글 실력’을 꼽았다. 건전한 상식이 있어야 문제를 문제라고 판단할 수 있고, 글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어야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후배들에게 조언, ‘당당하라’
왕 동문은 언론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진심을 담은 조언을 남겼다. “당당하세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하지 마세요. 나를 믿고 당당하고, 당당해지기 위해 준비해야 해요. 스스로 부족한 점을 알면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그건 오만한 거죠. ‘너 스스로를 믿고 그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의 말에는 기자가 되기 위해 기울였던 숱한 노력들이 담겨있었다.

그는 취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은 학우들에게도 조언을 남겼다.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서 열심히 도전하는 후배들의 실력은 사실 다 비슷비슷할 거예요. 그러면 ‘너는 뭘 잘해?’라고 물어봤을 때 자신 있게 ‘저 이거는 확실히 잘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왕 동문.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왕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