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폭로는 은폐되어 있던 진실을 공론의 장으로 드러내는 활동이다. 최근 미투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미투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틀을 되돌아보게 하는 운동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미투 운동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고 직종을 가리지 않고 사회 각 분에서 다양한 폭로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미 공개된 보도만 해도 대학도 미투 운동의 예외 영역이 아니라 진원지의 한 곳으로 밝혀지고 있다. 미투 운동이 아직 초기 상태인지라 사람들은 사실의 규명과 폭로의 진실성에 많은 관심을 두고 호응을 보이고 있다. 미투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조심하자는 분위기는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하는 분위기가 성 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거나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 회피의 현상을 낳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일견 예상되는 결과이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근원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미투 현상은 수직적 문화와 가부장 문화 등과 관련이 있지만 결국 사람의 관계가 대등한 인격으로 만나지 못하는 사회의 관행에 원인이 있다. 우리는 사람이 만날 때부터 제일 먼저 나이와 학번을 확인하고서 선배와 후배로 분류하고 그에 따른 대우 방식을 결정한다.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하고 후배는 선배에게 존댓말을 한다. 이렇게 사람 사이가 비대칭적인 언어 환경에 지속해서 노출되면 후배는 선배에게 할 말이 있어도 말이 어렵고 선배는 후배에게 편하게 말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된다. 언어 환경이 대등하지 않게 구조화되면 사람 사이는 선후가 상·하의 권력 관계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이행된다. 부탁해야 할 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고 부당한 일도 거부하지 못하는 환경이 일상화되기에 이른다. 이런 환경에서 용기 있는 몇몇 사람이 불편을 하소연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는 비대칭적 관계를 어찌할 수 없는 규범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규범 체계에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고통이 더 심각하지만 익숙한 사람은 무기력하게 투항하게 된다. 고통의 양극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람 사이가 고통을 주고받는다면 이는 분명 인권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대학을 비롯하여 사회가 대등한 인격의 만남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 터전이 되려면 비대칭적 언어를 교환하는 환경이 먼저 바꿔야 한다. 나이가 아니라 사람이 기준이 되면 반말을 어법으로 권장하는 언어생활이 달라져야 한다. 아울러 사람 사이가 자유로운 의사의 표명과 명확한 의사의 확인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의사를 묻지 않고 암묵적으로 서로 같다고 지레짐작하거나 이견을 알고도 존중하지 않는 풍토가 상존하고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다양한 분야와 내용으로 부당한 고통을 호소하는 미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고통은 종류와 정도의 양상에 따라 정상 참작이 되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노’라는 단말마의 외침은 가장 강력하고 분명한 의사의 표현이 왜 ‘노’를 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노’라는 반응을 익숙하지 않아 끊임없이 구체적인 해명을 요구하고 심지어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는다. 부당한 고통이 줄이려면 노를 노만으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