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기념관 개관기념 학술대회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달 31일 백범기념관에서 개관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로 시작하는 김구의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는 그의 애국심이 그대로 반영돼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인물 중 하나였던 그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의 ‘백정범부(白丁凡夫)’에서 비롯된 ‘백범’이라는 호를 썼다. 백범김구선생의 기념관 개관을 맞이해 그의 일생과 사상 등을 역사적 고증과 객관적 시각을 통해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편집자주
  

지난달 31일 효창운동장 뒤에 신축된 백범기념관에서 개관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번 학술회의는 ‘백범김구의 민족독립운동과 평화통일운동’이라는 큰 주제 아래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대회의실에서 진행됐다. 김구의 청소년기부터 인생말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 흐름에 따라 7개로 나뉜 소주제를 각각의 연구자가 발표했으며, 모든 발표가 끝난 후에는 소주제에 대한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는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먼저 ‘백범 김구의 청소년기 생활과 의병운동’을 주제로 국민대 조동걸 교수가 논의를 시작했다. 조 교수는 그동안 학계가 백범의 독립활동에 주목했을 뿐, 그의 인간상에 대한 연구가 너무 소홀했음을 지적하며 백범의 탄생부터 연중의병운동 시기까지를 꼼꼼하게 짚어갔다. 백범은 이 시기에 유교와 불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와 학문을 접하게 됐는데 조 교수는 이로 인해 백범이 다원적·중층적·포괄적 사상의 뿌리를 가지게 됐다고 평가했다.  

교회사연구소의 최기영 실장은 ‘백범 김구의 애국계몽운동’라는 제목으로 논의를 펼쳐나갔다. 최 실장은 김구가 1903년에 정식으로 입교한 후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지적, 이를 통해 김구가 서양학문을 받아들여 교육의 중요성을 크게 인지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발표에서는 ‘백범 김구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시각적 자료를 활용해 효과적이고 상세하게 주제를 다뤘다. 김 교수는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시절 맡았던 각각의 직책별로 그의 활동상을 제시하고 백범이 자기 위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점심식사 후에도 계속된 발표는 서울대 신용하 교수의 ‘백범 김구와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됐다. 신 교수는 “최근 일본에서 발굴된 새 자료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의열투쟁으로 폭사한 일본육군대장의 죽음을 공무사망이 아니라 전사로 규정한다”고 밝히며 “이는 일본도 우리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테러가 아닌 한국독립운동의 특무작전임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 교수는 거듭 우리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당시 한나라를 대표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었던 임시정부산하의 특공대 작전이라할 수 있으므로 분명히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고 말했다.  

한편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백범 김구와 중경 임시정부’를 주제로 김구가 중경에 정착하면서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인 △정부의 조직과 체제 정비 △좌익세력과의 통일 △국내진입작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백범 김구의 평화통일운동, 그 연원과 생명력’를 발표한 창원대 도진순 교수는 “해방 직후에 김구가 보였던 극우적 행동만을 가지고 김구를 극우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그 시기는 다만 김구 사상이 민족주의로 비약하기 이전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본교 김삼웅 겸임교수는 ‘백범 김구의 문화국가건설론’을 주로 백범일지를 중심으로 김구가 직접 쓴 글들을 통해 통찰했다.  

기념관이 신축됐다는 경사스러움이 함께하고, 학술대회자료집이 동이 날 정도로 열기가 넘쳤던 학술대회였다. 백범의 일생과 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독립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범은 독립지도자로 많이 알려져있을 뿐, 학술적인 규명이 부족했다. 기념관 설립에 힘입어 앞으로 학문적으로 김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임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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