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창우 문화평론가

기자명 우연수 (daleksupreme@naver.com)

입장 따라 상이한 그로테스크 양상
현대 사회, 축제성으로 나아가야

이창우 문화평론가는 저서 <그로테스크 예찬>에서 문화 이론으로서 그로테스크를 통해 영화를 해석하고 사회 변동을 설명했다. 그를 만나 현대 사회에서 읽을 수 있는 그로테스크와 그로테스크의 연구 의의에 대해 들어봤다.

영화 비평이 그로테스크 연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
동구권이 몰락하고 사회운동이 일어나면서,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일련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 변동을 겪은 사회 구성원의 정서는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대중매체에 반영되는데, 문학은 거의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반면 영화는 10년 정도 늦게 반영된다. 하지만 문학에 비해 영화가 파급력이 커서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한국 대중영화에는 그로테스크가 공통적인 코드로 나타난다. 2000년 초중반 박찬욱, 봉준호, 장준환 같은 거장 감독들의 영화에는 ‘무서운 것’과 ‘웃기는 것’의 결합이 많이 나타났다. 그 이후로 그로테스크적 양상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요즘 한국 영화에는 느와르적 요소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가령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7년의 밤’이나 ‘염력’은 느와르적 요소와 코미디 요소가 동시에 존재해서 ‘희비극’과 같다.

축제와 같은 예외 상태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에 대해 설명해달라.
예외 상태는 기존의 질서가 와해하고 대안적인 질서가 제시되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질서는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카를 슈미트와 같은 보수적인 철학자들은 체계를 ‘리부트’하는 기능으로서의 예외 상태를 이용해 지배층이 기존 지배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숭고의 그로테스크’, 다시 말해 ‘반축제의 그로테스크’가 나타나는 것이다. 초월적인 권력을 지닌 숭고한 존재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파시즘과 같이 예외적으로 야만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면 벤야민 같은 진보적인 철학자들은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기 위해 피지배층의 예외 상태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당 입장에서는 ‘축제의 그로테스크’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부산행’과 같은 좀비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좀비들, 즉 피지배층에 둘러싸인 주인공만을 비추기 때문에 숭고의 그로테스크가 나타난다. 반면 좀비의 입장에서는 축제의 그로테스크다. 좀비들은 축제에서처럼 동등하게 즐기면서 정상적 질서에 있는 주인공을 끌어내려 좀비 자신들과 같게 감염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19세기 낭만주의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숭고와 축제의 중간에 있어 ‘비정상의 그로테스크’라 한다. 이 시기의 부르주아 중간계급은 숭고의 그로테스크에 서 있으면서 하급 계층의 그로테스크를 빌려온다. 따라서 축제성에 대한 욕망과 도덕적 문란함에 대한 공포가 공존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그려지는 이중성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축제적 그로테스크가 있다면.
축제적 그로테스크는 사회가 자본주의화 되면서 발생하는 충격을 민속주의가 흡수할 때 나타난다. 하지만 한국은 이처럼 교차하는 중간과정이 없었고, 일제강점기에 이상의 문학 작품과 같이 소수 엘리트에 의해서 그로테스크가 표현되는 경향이 있었다. 자본주의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완전히 민족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탈춤이나 굿으로 축제적 그로테스크가 발생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를 이끌어낸 촛불 시위도 축제적 그로테스크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피억압자가 ‘혐오’를 이용해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억압자에 저항하는 것도 축제적 그로테스크에 가깝다. 예를 들어 ‘퀴어문화축제’나 ‘*잡년 행진’은 억압자가 피억압자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혐오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전시한다. 또한, 영화 ‘120BPM’에서는 HIV/AIDS 환자들이 피가 담긴 풍선을 던지며 제약 회사를 상대로 시위를 벌인다. 혐오를 당하는 자들이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로테스크를 통해 무엇을 고민할 수 있는가.
미국 주도 하의 세계 자본주의가 숭고를 향해 가면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있다. 사회는 경직돼있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근엄’하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 미선이·효순이 사태, 광우병 시위, 촛불 시위를 보면 추세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했던 80년대 사회 운동과 다르게 촛불 시위는 유모차를 끌고 오는 등 너 나 할 것 없이 축제처럼 즐기지 않았나. 숭고나 비장함으로부터 동력을 얻고 있는 진보 담론은 이러한 변화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흐친의 ‘웃음 문화와 같은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숭고의 그로테스크가 나쁜 것은 아니다. 5·18 광주 민주항쟁이나 세월호 사고와 같은 사건은 즐거움을 주지 않고 숭고나 비장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슬픔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에게는 만화 ‘원피스’의 루피와 영화 ‘처키’의 처키, 두 갈래 길이 있다. 처키는 모든 걸 배제하고 죽이려 들지만, 루피는 ‘고무고무 능력’을 통해 어디든 가닿고 무엇이 오든 그 충격을 소화한다. 몸이 다양한 요소들을 품으면서 자유롭게 변형되기 때문이다. 즉 무서우면서 즐겁고, 더러우면서 깨끗하고, 저급하면서 고급스러운, 이렇게 복잡한 스펙트럼을 수용하면 어떤 충격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의 탄압을 자산으로 추가해서 탄성력을 늘리는 축제적 그로테스크와 처키와 같이 세상을 등지는 숭고의 그로테스크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잡년 행진=‘잡년(Slut)’ 같은 야한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함으로써, 여성의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남성 중심적 시각에 저항하는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