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상환 (lsang602@skkuw.com)

응답자의 88.1% “에이즈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PL사랑방, PL들이 모여 일상 공유하고 고민 나누는 공간

유인물을 붙이는 KNP+ 최 대표.
PL사랑방 거실 전경.
'U=U'운동' 유인물이 벽에 붙어있다.


2011년 부산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에서 한국 PL(People Living with HIV AIDS)들은 놀랐다. *HIV·AIDS 감염인 인권 운동에서 소극적이던 자신들과 다르게, 해외 PL들은 자기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받은 한국의 PL들도 ‘침묵’을 깨기로 했고, 뭉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에서만 활동하던 ‘건강나누리’, ‘해밀’, 한국 청소년·청년 감염인 모임 ‘알’ 그리고 가톨릭 성당에서 운영하는 ‘레드리본’ 등 흩어져 있던 그들이 모였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공식 HIV·AIDS 감염인 모임인 ‘KNP+’가 시작됐다. 뭉친 그들에게는 공간이 필요했다. 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고, 함께하는 ‘식구’를 품을 공간.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근처 연립주택 반지하에 24평의 공간이 마련됐다. PL들의 사랑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PL사랑방이라 이름 붙였다. PL은 HIV·AIDS 감염인의 다른 표현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지난달 28일 3시, PL이자 PL사랑방의 상근근무자인 KNP+ 최문수 상임대표가 기자를 반겼다. 내부로 들어서니 10여 명은 넉넉히 둘러앉을 너른 거실이 있었다. 사무실과 상담실이 거실을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고, 상담실 벽에 있는 유인물에는 생로병사를 겪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정보들로 빼곡했다. 주거취약계층지원이라고 적힌 유인물에서는 그들이 주거에 대한 고민을 나눈 흔적이 묻어나왔다. 최 대표는 그 공간에서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나누며 생로병사를 함께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상담실 벽에 붙어있는 유인물에는 ‘U(You)=U(You)운동’이라고 적혀있었다. 독특한 이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담실 중심에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PL들과 상담을 진행한다고 했다. 최 대표는 의자에 앉으며 “국립의료원 근처라서 진료를 받으러 온 PL들이 방문하기 좋다”고 덧붙였다. 문 너머로 두 명의 PL이 PL사랑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에이즈 30년, 여전히 한국은
“아직 사람들에게는 HIV·AIDS가 공포로 인식되는 듯해요”라고 말하며 최 대표는 한숨을 쉬었다. 병뿐만 아니라 혐오가 그들을 힘들게 했다. 50대인 그는 “병에 걸리면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며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해, 혼자서 속으로 앓았다”고 회상했다. 무엇보다 의료 거부가 그들을 가장 힘들게 했다고 한다. 병원에 가면 PL임을 밝혀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데, 치료를 거부하는 병원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최 대표가 상담한 PL은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병원 측은 그에게 ‘HIV·AIDS 환자용 세척 요망’이 붙어 있는 일회용 식기를 주며 격리치료를 진행했다. 최 대표는 “성행위나 직접적인 수혈이 아니면 바이러스가 전파될 일이 없는데, 그런 처우를 받으니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가 말한 의료 거부나 차별을 한 병원 중에는 들으면 알만한 대형 병원들도 많았다. PL사랑방 회원 소주(가명) 씨는 “청년들의 경우, 취업할 생각을 못 한다. 입사 시험에 건강검진이 있어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덧붙였다. 군대 등의 집단에서도 차별이 빈번했다고 한다. 얼마 전 소주 씨와 상담한 어느 청년 PL은 군 시절 자신이 PL임을 부대에서 알게 되자 자신이 사용하던 자리를 전부 소독하도록 했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 소주 씨는 “잘못된 편견이 만든 일”이라고 한탄했다.

HIV·AIDS가 나타난지 30년이 지났고, 의료기술은 발전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비감염인들과 PL의 평균수명은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하지만 HIV·AIDS에 대한 인식은 30년 전에 머무르고 있다. 2016년 UN AIDS의 조사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에서 PL들의 자살률은 전체 자살률의 10배가 넘는다. 또한, 한국인 응답자 중 88.1%가 ‘에이즈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최 대표는 동성애와 HIV·AIDS를 연결해 생각하면서 일어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차원에서 HIV·AIDS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자리 잡도록 교육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하며 책장으로 향했다.

그는 책장에서 유인물과 책을 가져와 건넸다. 그 안에는 벽에 있었던 ‘U=U 운동’ 유인물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어서 ‘U=U 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에서 약만 잘 먹으면 PL들의 HIV가 일정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발표했는데, 그렇게 되면 바이러스가 비감염인들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며 “발표 이후 유럽에서는 U=U 운동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모두 같은 ‘보통의 존재’라는 의미였다. 

건물 주차장에는 PL사랑방에 들른 PL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천둥(가명) 씨는 “HIV·AIDS 관련 기사가 나오면, 저는 댓글을 못 봐요”라고 말했다. “댓글에 적힌 욕을 보면, 며칠이 고통스러워서”라고 이야기했다.

모두가 함께 하는 공간
다시 찾은 상담실에서 소주 씨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에 열중하던 그는 “오늘은 일이 많은 날이다”라며 웃었다. 그는 PL사랑방뿐만 아니라 한국 유일의 청소년·청년 HIV·AIDS 단체인 ‘알’의 운영진도 병행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알’의 운영진 업무라고 설명했다. 소주 씨는 PL단체에서 몇 안 되는 비감염인이다. 그는 “제10회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에서 있었던 불합리한 상황들과 열악한 인권 실정을 보고 난 뒤 PL들과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PL들과 연이 닿아, ‘KNP+’와 ‘알’의 창립 주축 중 하나가 됐다.

일정이 적힌 칠판 위로 그들의 일상이 일렁이고 있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상담실에서 신규 PL들과 함께하는 오픈마이크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다 같이 모여 차를 마시고 자신들의 일상과 고민을 나눈다. 일정표에 적힌 대구오픈토크도 눈에 띄었다. 최 대표는 “PL사랑방에 오지 못하는 지방에 있는 PL들과도 이야기 나눌 기회를 만들기 위해 지방 오픈마이크 순회 및 힐링캠프도 계획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매년 다른 단체와 협력해서 세계 에이즈의 날에 클럽 파티를 기획한다. “그 수익금은 HIV·AIDS 인권운동에 사용된다”고 소주 씨는 덧붙였다. 최근에는 시청 앞에서 비감염인들의 왜곡된 상식을 바로잡기 위한 ‘HIV·AIDS 바로 알기 운동’도 계획 중이라고 했다.

PL사랑방은 그곳에 있다
상담실 문틈 너머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연령대로 보이는 그들은 거실과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주 씨는 운영진들 회의가 있는 날이라고 설명했다. 모인 사람들과 인사하며 최 대표는 “현재 HIV·AIDS 요양병원 마련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밝혔다. 2014년에 한국에서 유일하던 에이즈 요양병원이 문을 닫았다.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현상이 그곳에 나타난 것이다. 최 대표는 오늘 회의에서도 요양병원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게 그들은 치열하게 ‘침묵’을 깨고 있었고 그 중심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간인 PL사랑방이 있었다.

소수자 인권운동의 고전적 구호인 “침묵은 죽음이다”는 단순히 사회를 향한 메시지는 아니었다. 사회적 질병을 앓고 있는 같은 소수자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PL들이 만나 일상을 공유하고 슬픔을 다독이는 일도 ‘침묵을 깨는 일’일 것이다. 침묵을 깨고 입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식구가 되는 공간. 그래서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공간. 그들은 PL사랑방을 그렇게 정의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해 숨어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친가족에게도 말 못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가족이 이곳에서 생겼다”며 “더 많은 PL이 모여서 일상을 공유하고 고민을 나눴으면 한다”는 천둥 씨의 말에는 PL사랑방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아직 PL사랑방은 그곳에 있고, 24평의 헐거운 공간을 한국 PL들의 염원이 지탱하고 있다.

HIV/AIDS=인체면역 결핍 바이러스인 HIV가 후천성면역 결핍증세인 AIDS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이다. 둘은 인과관계에 있다.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qwertys@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qwert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