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주인공 이영애가 한 회도 빠짐없이 단아하고 고운 한복을 입고 등장한다.
한복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우리 문화 한은희 한복’의 오너 디자이너 한은희(수학 74) 동문의 솜씨다.
신사동에 위치한 한복숍에서 그를 만나봤다.

기자명 박채연 (cypark4306@skkuw.com)


포백척 연구로 한복 디자인 완성한
한은희 디자이너
남들 다하는 세계화보다는
한국 고유의 자긍심 지키고파

유년시절, 한복의 매력에 빠지다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한복을 갖추어 입으신 모습이 아주 정갈하고 예뻤어요. 그때 느낀 한복에 대한 소중함과 정갈함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한 동문의 외할머니는 양반가의 위엄을 중시하는 분이셨다. 그래서인지 한 동문이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언제나 단정한 한복과 함께였다. “주무실 때 머리에 쓰시는 조바위부터 벗으시고, 두루마기 그다음에 한복을 벗으셔서 하나하나 개켜 놓으시며 머리맡에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잠이 들곤 했어요. 아침에 눈뜨면 또 그걸 하나하나 차곡차곡 입고 계시는 거예요.” 외할머니가 한복을 입으신 모습은 현재 디자이너가 된 그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수학은 약속이다
그가 처음부터 한복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학시절 의상학이 아닌 수학으로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수학보다는 예체능을 더 잘했는데, 부모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재능을 꾹꾹 눌러 담았죠. 선생님이 되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맞춰 수학과에 진학하게 됐어요.” 그는 하나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수학을 매력적이라고 느꼈으며, 그 약속을 지켜나가는 재미로 수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다. “사람들은 보통 계산을 수학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산수일 뿐이에요. 진짜 수학은 집합이나 해석학 같은 하나의 정돈된 이론인 거죠,” 그는 수학에서 배운 약속을 철저히 지켜왔던 부분이 실제 삶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수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수학선생님이 되는 진로를 택했다. “교직에 5~6년 정도 몸담았어요. 학부에서 교양과목도 가르쳤고, 고등학교에서는 수학을 가르쳤죠.” 하지만 가르치는 일이 너무 즐거웠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결혼을 하면서 육아와 교직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애 둘을 낳아 키우다 보니까 육아에만 전념하는 것도 버거웠죠. 그 당시에는 내 아이도 제대로 못 키우면서 남의 집 아이를 키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교직을 그만뒀어요.”

한복 디자이너로서 열게 된 인생 2막
육아 때문에 선생님을 그만둔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하던 사람은 다시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복 원단을 제작하는 남편의 일 덕분에 한복을 가까이 접하며 새로운 일에 빠져들었죠.”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남편의 공장에 있는 남은 원단들을 활용해 주변 사람들의 한복을 만드는 것이었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기존의 원단을 활용해 한복을 지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이 들어서 직접 만들어 보게 됐어요.” 사람들의 반응이 좋고,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한복을 보자 그에게는 아쉬움과 갈증이 생겼다. “내가 전문적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 한복을 잘 만드시는 분을 찾아가서 배웠어요. 심지어 기존에 있는 색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염색을 따로 배울 정도로 열심이었죠.” 수학을 공부할 때의 학구열은 한복을 지을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하나를 배우면 그 분야에 푹 빠져서 끝까지 알고자 하는 게 제 성격이었던 거죠.”

모두가 선망하는 선생님을 그만두고 한복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왜 이제 와서 그 힘든 바느질을 시작하느냐고 물었어요. 당시에는 여자가 석사학위까지 마치기 쉽지 않았으니까 모두들 기막혀했죠.” 주변의 만류를 이겨내고 난 후에도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몇몇 손님들은 한복을 작품이 아니라 그저 사고파는 물건으로 생각해서 막무가내로 값을 깎아내리려고 했었죠. 그런 고객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힘겨운 일이었어요.”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그에게 식구들은 일을 그만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일하는 것을 말릴 때마다, 십 년은 지나고 난 후 이 일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결정하겠다고 했죠. 십 년도 꾸준히 노력해보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적절치 않다 생각했어요.”

수학과 한복 사이의 교집합, *포백척 연구
배우 이영애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한복을 담당하는 한복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한복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학부에서 의상학을 전공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어요. 안목이 높으신 분들이 많이 찾아오시는데, 혹시나 전통과 격식을 잘못 알고 한복을 권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죠.”

고민 끝에 그가 생각해낸 것은 모교에서의 의상학 공부였다. 공부를 하던 과정에서 그는 교수님의 제안을 받았다. “담당 교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수학을 공부했으니 과거의 포백척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연구를 해보라’고.” 그 후 그는 포백척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쉽게 말하자면 포백척은 옛날에 의복의 치수를 측정하는데 사용한 자예요. 고문서에 등장하는 자가 지방마다 각각 차이가 있어서 통일된 치수로 재해석할 연구가 필요했던 거죠.” 지금보다 키가 작고 목이 짧은 옛 선조들의 체형을 기준으로 한 치수를 현대인의 체형에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따라서 그는 몇 년간 고문헌 속의 치수를 현대인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포백척을 연구하기 전까지 한복을 디자인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보트넥이나 브이넥처럼 변화가 있는 양장과 달리 한복은 형태가 같아요. 비슷한 형태의 한복이지만 사람의 체형은 다양하기 때문에, 단점을 보완하면서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한복을 짓는 일은 너무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는 포백척 연구를 한 후에 디자이너로서 완성된 것을 느꼈다. “매번 긴장하면서 하는 작업이었는데, 의상학과에 가서 고문헌 속의 옷을 현대인의 다양한 체형에 맞게 재현해 보며 디자인이 조금씩 안정된 느낌이 들었어요.” 포백척 연구뿐만 아니라 의상학과에서의 공부는 그에게 많은 선물을 남겼다. “석박사 과정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여러 문헌을 접해본 거예요. 고증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고 한복을 만들어 가면서 우리의 것 한복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이 생긴 거죠.”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한 동문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복 본연의 미’라는 주제에 가장 적합한 디자이너라고 알려져 있다. “한복 본연의 미는 지나간 다음에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은 아름다움이에요. 우리나라 시골의 들녘에 있는 채송화, 봉숭아, 코스모스 같은 꽃들처럼 한 틈 쉬고 가게 하는 그런 색감의 옷들, 그게 우리나라 본연의 미인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가진 그는 한복을 입는 순간도 남다르게 묘사했다. “바쁜 일상에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니다가 한복을 입으면, 툇마루에 누워서 살살 부는 솔바람을 쐬는 기분이 들어요. 살면서 가끔씩은 그렇게 한복을 입고 쉬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어떤 특별한 한복을 입은 날에는 그 기분과 여유를 느껴야 한다고 봐요.” 그는 독자들에게 한복이 매 순간마다 정성을 다해 입어야 한다는 옷임을 기억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한복 본연의 미를 잘 살린다는 평을 얻었던 만큼, 그는 우리의 한복 문화를 널리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2001년 캐나다 온타리오 뮤지엄에서 한복 패션쇼를 진행했을 때, 캐나다 교민들이 흘리는 감격의 눈물을 보면서 소명감을 가지게 됐다. 그는 작년 가을 경복궁 한복의 날 패션쇼에서 ‘소색의 끌림’이라는 주제로 한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유의 색감과 우리나라 고유의 한복이 이겁니다라는 말을 전 세계에 당당히 전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제 목표예요.” 그는 한복의 세계화 역시 중요하지만, 가장 전통적인 것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인정받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애 씨가 해외에 나가서 전통적인 색깔의 한복을 입었을 때,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가장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가 생각하는 세계화는 단순히 외국인에게 입히기 위해서 한복을 변형하는 것이 아니다. “무분별하게 변형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전통한복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한복을 입을 때 자연스럽게 한복의 세계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기본을 알아야 한다는 선배의 조언
요즘 젊은 세대가 많이 입는 저가 한복에 대해 견해를 묻자, 그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마음이 아파요.  간편하게 입는 것과 막 입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간단하고 저렴한 것은 필요하지만, 자존심과 기본은 좀 지켜야 할 필요가 있죠.” 그는 폴리에스터와 나일론 소재로 만들어진 한복을 ‘국적 없는 음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음식으로 치자면 최소한 된장찌개를 끓일 줄 알고 변형을 해야 하는데, 전통음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국적 없는 음식을 만드는 게 안타까워요.” 학생들이 전통과 기본을 알면서 약간씩 변형하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지만, 기본 자체를 모른 채 무분별하게 저가 한복을 입는 것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 동문은 한복 디자이너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진심 어린 조언을 남겼다. “후배들이 조금 오래 걸려도 여유를 가지고 느리게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이 학부에서 옷을 만드는 법을 배웠으니까 금방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요. 10년이라는 세월을 견딜 수 있어야지만 옷이 무엇인지 알고 그다음 흔들리지 않는 디자이너로 남을 수 있어요.” 늦은 나이에 한복에 입문해 34 년간 굳건히 한복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을 다져온 한 동문, 그는 후배들에게 기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하고자 했다.

*포백척=포백의 치수를 측정하고, 포백의 매매와 의복을 만드는데 사용한 자.
 

조선시대 천재화가 사임당 신씨의 삶을 재해석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포스터한은희 동문 제공
조선시대 천재화가 사임당 신씨의 삶을 재해석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포스터
ⓒ한은희 동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