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품격을 높이는 전략가,
행동 하나하나에 숨어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분석가,
아무도 가지 않았던 ‘이미지 전략가’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 *퍼스트 펭귄, 허은아(한국철학 96) 동문을 만났다.

기자명 김준현 (wnsgus0307@skkuw.com)


점점 더 커지는 이미지의 중요성
이미지가 품격을 높여
친절 강대국 대한민국 만들고파

 

결핍을 무기로, 단점을 장점으로
허 동문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과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부모님은 동생을 더 많이 챙겼어요. 저는 혼자 등교했지만 동생은 제 나이가 돼도 부모님과 함께 학교에 갔어요. 숙제도 저는 항상 혼자 했지만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했죠. 그런 영향 때문인지 ‘뭐든 혼자 해야 한다’라는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요.”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부모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해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시골에 내려가면 남동생만 챙기고 저는 본 체도 안 하셨어요. 자존감이 많이 사라졌죠. 그런 상황이 싫어 시골에 내려가기 싫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알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제 말을 존중해 주셨죠. 그 이후부터 ‘생각을 잘 전달하면 나도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어린 나이에도 위축되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자신감을 높이는 방법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여자라서 차별받았던 어린 시절에 스스로 작아졌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남동생과의 사이에서 차별받고, 여자라서 조부모님께 무시 받았지만 그는 사랑의 결핍을 ‘책임감’, ‘자신감’이라는 자신만의 무기로 바꿨다.

그에게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저는 정말 잘 잊어요. 외워도 금방 까먹고 잘 외우지도 못해요. 이후에 사업을 하면서 사기를 당했을 때 누가 나에게 사기를 쳤는지 까먹을 정도로 잘 잊죠.” 그는 그 점을 장점으로 탈바꿈했다. “매일 매일이 사건 사고였고,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일이 많았지만 저는 그 상처를 오래 기억하지 못해요. 대신 지나고 나면 하나의 경험이 돼 있어요. 제 성격이 이렇다는 것이 이제는 축복으로 느껴져요.” 그는 시련이 온 만큼 더 큰 깨달음과 보상이 뒤따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현재(現在)에서 존재(存在) 찾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만약 그런 일을 한다면 행운아죠. 그렇지만 자신이 뜻하지 않았던 길을 가더라도 그 상황에서 후회하고 도피하기보다는 그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해요.” 그는 대입 당시 성적에 맞춰 우리 학교 한국철학과로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학과에 진학했지만 그는 철학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철학 수업은 지금 저의 자아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만약 제가 철학과에 온 것을 후회했더라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겠죠. 특히 논어 수업이 기억이 나요. 대학에 들어와 유학을 배우고 선인들의 예(禮)에 대해서 배운 게 소중한 가치가 됐어요.” 대학 시절 들었던 논어 수업의 내용은 그가 차린 예라고(Yerago) 회사의 철학이 됐다. “선택하지 않은 현실이라고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한심한 행동은 없어요. 저는 원했던 학과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철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저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했고 미래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태도를 배웠어요.”

세계를 누비며 얻은 경험
그는 항공기 승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수많은 국가를 오가면서 여러 승객을 만났다. 그 속에서 그는 국가 이미지가 국민 한 사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의 모습을 보면 그 국가의 품위를 느낄 수 있어요. 아이들이 떠드는데도 방치하는 부모, 승무원을 막 대하는 승객 등 다양한 장면이 연출되죠.” 비행기 안에 여러 국적의 사람들은 각자 민간 외교관이 되고 그 나라의 대표가 된다는 의미였다. “국가의 이미지는 국민에게서, 도시의 이미지는 시민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파리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는데 길 가던 할머니가 직접 저희를 에펠탑까지 데려다주신 적이 있어요. 할머니의 친절함 덕분에 에펠탑의 철조물이 따뜻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승무원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이미지’가 가지는 힘을 알게 됐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한 달간 병가를 내자 그는 승진에서 밀리게 됐다. 한 분야에서 1, 2등을 꿈꾸는 그에게 더 이상 승무원의 길은 매력이 없었다. 회사를 나오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는 파리의 친절한 할머니, 뉴욕 가게의 유쾌한 점원, 하와이의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는 꼬마를 떠올렸다.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 국가의 얼굴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이미지가 가지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깨달음은 ‘친절 강대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사업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미개척의 영역, 이미지 전략가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큰 뜻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의 눈앞에는 막연함뿐이었다. “이미지 컨설팅이라는 것이 당시에는 되게 생소한 개념이었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미지 컨설팅에 관해서 설명해주고 강연을 들어보라고 홍보하고 다녔죠.” 그는 하루에 신촌에 있는 가게 300군데 이상을 돌았을 정도로 절박하게 일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승무원 출신이 무슨 전문성이 있어서 강연 하겠냐’는 불신이 대중에게 있다고 느꼈다. 이에 하루빨리 전문성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어린 나이를 숨기고자 일부로 나이 들어 보이게 화장을 하고 머리도 짧게 잘라 프로필 사진을 찍었어요.” 그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부터 철저하게 시작했다.

사업에 필요한 학문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학교 경영학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었기에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학위를 취득했을 때는 눈물이 났어요.” 외롭지만 그가 원하는 분야였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는 것에 그는 더욱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의 길에 확신이 생겼다.

칠전팔기의 노력, 이제는 그 빛이 보이다
자신감 넘친 그였지만 이미지 전략가라는 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간 겪었던 수많은 일 중 ‘한상대 검찰총장의 청문회 리허설’을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회사는 한상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리허설에 참여했다. 이미지 전략가로서 그는 한 후보자가 야당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하지 않도록 트레이닝을 했다. “답변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어떤 표현을 피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손동작, 표정, 의상 스타일 등 다양한 부분에 지도를 해줬어요. 발언자의 이미지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죠.” 문제는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가 이미지 메이킹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청문회 리허설이 구설에 올랐다는 것이다. 각본이 있는 청문회라고 한동안 언론의 몰매를 맞은 그는 이 시기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전했다. 이런 시련에도 그는 주저앉지 않고 이미지 전략이라는 분야를 고집 있게 끌고 나갔다. 이미지 마케팅의 선구 주자로서 그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노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들어서는 이미지 전략가의 역할에 대해서 좋은 소식이 들리고 있다. “몇 달 전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도 개인정보 유출 등의 책임을 묻는 청문회에서 훌륭한 태도를 보였죠.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강인한 이미지를 얻었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저커버그가 자신의 상징인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벗고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양복을 입은 것은 그가 이번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잘못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이미지를 비췄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계획된 이미지 컨설팅 덕분이었다. 페이스북의 주가는 다시 반등했고 저커버그의 이미지는 제고됐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이미지 전략가의 입지가 더욱 커지게 됐다고 말했다. “잘 트레이닝 받은 저커버그의 대처가 위기의 상황을 기회로 만들 듯, 이미지 컨설팅은 개인의 이미지 제고뿐만 아니라 위기의 상황을 기막힌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매력적인 분야예요.” 그는 더 나은 브랜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이미지 전략가의 노력이 이제는 사회의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재치 있는 성균관 유생들이 되길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싸움이 계속됐지만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끝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 작년에는 국내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는 14번째로 *CIM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20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국내 최고의 자리에서 퍼스트 펭귄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이미지 전략가로서 그는 여러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고 관리하지만 이미지를 평가하는 면접관으로도 활동한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 항공인 선발심사에서의 경험을 들려줬다. “후보자 프로필만 봤을 때 30명의 후보 중 떨어뜨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스펙들을 모아놓은 사람들이었죠. 20대에 박사학위를 3개나 취득한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면접이 진행되자 그는 오히려 뽑을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후보자의 돌발 상황 대처능력을 보기 위해 일부러 곤란한 질문을 하는데 어떤 후보자는 면접관의 질문에 화를 내기도 했어요. 당연히 최저점수를 받았죠.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에 대한 면접자의 태도를 보는 거예요.” 이처럼 면접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매너 있고 재치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빼어난 실력만큼 실제로 면접관들이 원하는 것은 면접자가 우리 기업에 왔을 때 ‘잘 화합할 것인가’예요.” 그는 개인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인성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후배들이 매너 있고 센스 있는 유생으로 성장해 하루빨리 사회에서 만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퍼스트 펭귄=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용기를 내 먼저 도전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도 참여의 동기를 유발하는 선구자를 가리킨다.
*CIM=Certified Image Master(이미지 마스터, 이미지 컨설팅 분야 국제 인증 최고학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