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상환 기자 (lsang602@skkuw.com)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 qwertys@

하루 평균 근로시간 19.8시간···찜질방에서 3시간 자고 다시 촬영장으로
턴키계약, 기형적 구조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

낭만적인 카메라 화면 뒤의 세상은 냉혹했다. 지난달 1일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 조연출 김규현 씨 사망 이후, 열악한 방송계의 현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해, 10월에는 <혼술남녀> 이한빛 PD가 자살했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근무 중 쏟아지던 언어폭력 때문이다. 이후 방송 촬영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바뀌지 않았다.
지난달, 사전제작 중인 드라마 <사자>의 임금 미지급 사태가 일어났다. 제작사는 “임금이 미지급된 스태프는 다른 하청업체 소속이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며 책임을 부인했고, 하청업체는 “제작사가 모든 것을 총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콘텐츠 왕국이라 불리던 화려함 뒤에 하루 19.8시간을 일하는 촬영 일정, 임금미지급의 책임 소재조차 찾기 힘든 기형적 노동 구조가 있었다.  

살인적 촬영 일정···언어폭력도 만연
방송계에서는 촬영을 ‘*디졸브 촬영’이라고 한다. 방송계 은어로 밤샘 촬영을 계속해 화면이 교차하듯이 하루가 지나간다는 의미다.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 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방송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9.8시간을 일했다. 촬영 현장에서 쪽잠을 자거나, 현장 근처의 찜질방에서 자는 경우도 많았다. 익명의 방송 스태프는 “잠자는 여건이라도 제대로 보장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한빛PD 역시 55일간 단 2일 쉬고, 하루 평균 4.5시간만 쉬었다.

긴박한 촬영 일정이 계속돼 안전 점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화유기>의 긴급 촬영에 한 방송 스태프가 크게 다치기도 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 이만재 국장은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안전점검이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디졸브 촬영이 계속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이 국장은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업무량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촬영 일자가 길어질 경우 지급해야 하는 일당도 많아지기 때문에 디졸브 촬영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방송 촬영 스태프 장광훈 씨는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낮은 막내들의 경우 일당이 최저시급보다 낮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폭언과 성희롱 역시 빈번했다. 지난해 10월 이상돈 국회의원이 작성한 <방송제작 스태프 계약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노동자 4명 중 1명은 폭언 및 성희롱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2차 가해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아 신고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빛센터 자문담당인 김유경 노무사는 “방송 스태프들은 업계가 좁아 2차 가해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대부분···법의 비탈에 서 있다
노동부는 지난 7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면서 방송계를 특례 업종에서 제외했다. 일부 방송사에서는 근무시간을 줄이기 위해 A, B 촬영팀을 나누도록 권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근로조건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김 노무사는 “초반에는 어느 정도 따르려는 모양새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빛센터 탁종렬 소장도 “주당 근무 일수가 줄었을 뿐이다. 하루 근무시간은 줄지 않았다”라며 “몸이 견딜 수 있도록 하루 근무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있었다. <방송제작 스태프 계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노동자의 86%가 표준계약서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응답자의 76%는 서면계약 없이 구두만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고 응답했다.

비정규직 방송스태프들은 법의 비탈에 서 있다. 김 노무사는 “스태프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 일하는 장소, 관리·감독관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김 노무사는 “방송스태프들은 해당 조건들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많아 임금도 자주 미지급됐다. <방송제작 스태프 계약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스태프의 42%는 임금이 미지급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한빛센터 탁종렬 소장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제공
한빛센터 탁종렬 소장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제공

방송계의 고질병···무엇이 문제인가
‘턴키계약’이라고 부르는 기형적 계약 방식이 근본적 문제였다. 턴키계약 방식은 방송계와 건설업계의 독특한 계약 형태다. 이 구조 속에서는 방송사와 제작사가 계약하고 다시 제작사가 아래 외주 업체에 하청을 맡기는 과정이 반복된다. 제작사가 카메라팀, 조명팀 등과 계약하고, 각 팀이 다시 밑의 스태프들과 계약하는 형태이다. 문제점은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다. 탁 소장은 “촬영 도중 사고가 나도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며 “법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바로 위 하청업체가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국장도 “스태프는 하청업체를 관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은 제일 위의 제작사가 지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제작사와 하청업체는 *도급계약을 진행한다. 결국, 하청업체는 프리랜서로 계약하기 때문에 책임 소재를 제작사가 지지 않는다. 이는 제작사 위주의 계약이 만연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국장은 “심한 경우 사고가 발생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계약서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명백한 불공정계약이다”라고 말했다.

주간 드라마 방영 횟수, 시간, 제작되는 프로그램 수 역시 해외에 비해 많다. 탁 소장은 “드라마 한 편에 80분 이상, 주 2회 반영하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계속된 논란으로 인해 지상파 드라마는 편당 시간을 60분으로 줄이기로 했다. 법의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한 케이블 방송사는 여전히 긴 방송 시간을 유지하고 있다.

방송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탁 소장은 “영화계처럼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경우, 근로시간 등이 법적으로 잘 보호받고 있다”고도 말했다. 또한, 영화계는 제작사가 개별 방송 스태프와 직접 계약하고 있다. 이 국장은 “제작사와 스태프들이 직접 계약하는 개별근로계약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방송사나 제작사가 이를 한 번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개별도급계약이라도 하자고 말하고 있다. 계약서가 작성되면 이전보다는 법의 보호를 받기가 쉬울 것이다”라고 했다.

모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개별적으로 계약하고 싶지만 제작비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탁 소장은 “근로계약서를 쓰게 되면 보험료 지급, 사고 책임 등 자신들이 책임질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영화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계의 인권을 위한 투쟁, 사회적 분위기 등이 결합돼 변화를 얻어낸 것”이라며 방송계도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국장도 “프리랜서들은 법의 보호조차 받기 힘들다. 최소한의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디졸브=한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화면이 점차로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 긴박한 촬영 현장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
*한빛센터=이한빛 PD의 유족들이 CJ E&,M에게 받은 위로금을 기부해서 만든 단체. 방송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상담 및 고발 활동 등을 하고 있다.
*도급계약=당사자의 일방(수급인)이 어느 일을 완성할 것을 약정하고 상대방(도급인)이 그 일의 결과에 대하여 보수를 지급하는 것. 프리랜서 계약이 이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