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내가 살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장면들은 이 길들을 따라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정동길, 덕수궁 돌담길, 청계천로, 종로, 그리고 대학로. 두 시간이면 너끈히 걷고도 남을 거리에 내가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과 걸음이, 그들과 나눈 대화와 터뜨린 웃음과 쏟아낸 감정들이 유리구슬처럼 굴러다닌다. 발에 채서 흩어지기도 그러다가 다시 내게 돌아오기도 하면서 숱한 이음줄을 만든다. 그리하여 잘 조율된 악기처럼 아름다운 선율로 내게 온다.

정동길에는 미국의 선교사가 세운 아름다운 학교가 있다. 여느 고등학교가 그러하듯이 낮에는 학생들의 생기로 와글대고 밤에는 촉촉이 젖은 고요한 공기가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그런 학교. 교정에 첫걸음을 내디딜 때면 복숭아처럼 수줍었던 무영의 가방에 달려있던 키링이 달칵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천장이 높은 자습실에서 아득한 밤을 맞이했던 장마철의 기억과 노란 리본을 가지마다 매달았던 다정한 마음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기어 맞아주는 경비실의 선생님이 또다시 한번 그곳을 찾는 추동이 된다.

부드럽게 구부러지는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위대한 무명의 화가나 명필가들이 자기의 작품을 길에 세워두고 내다 팔았다. 재즈기타를 연주하는 음악가가 게릴라 공연을 펼친 날의 기억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화려하고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다. 작열하는 태양에도 선선한 그림자를 드리우던 암은행나무들은 공기가 차가워짐에 제 몸을 태워 열매를 맺는다. 은행 열매 콤콤한 냄새가 풍기는 그 길에서 출입카드든지 명찰을 목에 매고 삼삼오오 모여 걷는 회사원들과, 나른하고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연인들은 우리의 미래가 되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으로 이곳을 걸을까? 그럴 수 있을까, 속닥였다. 나는 졸업 후 그 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숱하게도 걸었다.

돌담길을 빠져나와 세종대로를 조금 걷다 보면 청계천. 아름답게 깎아놓은 금속처럼 반짝이며 빛을 담아내고 튕겨내는 물결은 마치 불이 타오르는 걸 볼 때처럼 넋을 놓게 하는 힘이 있다. 해가 뉘엿하게 지고 하늘에 무화과 색이 감돌 무렵에 하천은 붉은빛으로 물든다. 그 천변에서 나눈 대화들은 언제나 둘만의 것이 되고 다른 목소리들보다 분명한 소리로 오래도록 남게 된다. 광교, 수표교, 혹은 세운교 즈음일까 청계천진출입게이트를 타고 올라오면 종로의 부산하고 조금은 지쳐 보이는 골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갖가지 모양의 조명을 진열해둔 조명가게가 끝없이 이어지고, 둘이 걷기에는 좁은 인도를 사람들은 바투 붙어 서서 걷는다. 그리고 창경궁로나 마로니에공원 길을 따라서 도착하는 곳은, 말하자면 입 아프도록- 추억이 방울방울 들러붙은 대학로.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도를 열어두고 동선을 상상해 그려보면서, 오래된 친구의 이름을 오랜만에 듣듯이 익숙한 반가움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걷고 또 잠시 멈추었던 길들이 얼마나 생생히 내게 남아있는지 새삼스레 되새긴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의 켜켜이 쌓인 책들, 과분한 공연들을 보았던 세종문화회관, 애인의 전역을 축하했던 낙산공원 길의 야경과 흥국생명빌딩 지하의 작은 영화관, 북촌 한옥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악기를 연주하는 외국인들의 낯섦 같은 것을 내가 얼마나 오래 간직하는지를. 이 길들을 걸어왔고 그리고 그 순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는 얼마간은 반드시 닮지 않았을까 주제넘은 생각도 해본다. 10대의 후반 그리고 20대의 초반에 이 아름다운 장소에 와 닿을 수 있었던 나의 큰 행운에 또 한 번 감사하면서, 어떤 평범한 하루에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이 길들을 걸어보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다.

김지호(영문 15)
김지호(영문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