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상환 기자 (lsang602@skkuw.com)


기사를 쓰는 것은 늘 낯설고 어렵다. 기사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령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이 문장에 의견은 쉽게 개입된다. '꽃은 피었다'고 한 글자만 바뀌어도 이 문장은 의견의 세계가 된다. 기사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양면성을 가진다. 독자는 기사를 징검다리 삼아 언어 너머 진실로 간다고 믿지만, 다리를 지탱하는 인간의 언어는 한없이 불순하고 불완전하다. 아무리 정제된 언어도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기사의 신이 있다면 객관성이다. 기사는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을 추구하는 글이다. 그러나 사실을 선택하고 다가가는 필자의 시각이 이미 주관적이다. 기사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개의 신을 섬긴다. 글 쓰는 사람은 늘 그 간극 속에서 겉돌고 있다. 그렇다면 객관과 주관이 구분되지 않는 이 언어의 지옥을 우리는 그저 절망해야만 하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그들은 집 안에서, 탄탄한 침대에서, 탄탄한 지붕 밑에서 … (중략) 그런데 너는 깨어 있다. 너는 파수꾼의 하나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만 한다. (카프카)" 우리는 깨어있기 위해, 이상으로나마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 끝없는 자기검열을 지속해야 한다.

"인간의 진실이 과연 신념 쪽에 있느냐 의심 쪽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 많은 진실은 의심 쪽에 있다고 믿는다(김훈)"던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의심하고 늘 질문해야 한다. 나는 늘 우리의 기사가 독자에게 질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모든 고민은 닥쳐올 기사 앞에서 무효였다. 기사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이미 쓴 기사나 쓰지 못한 기사나, 지나간 기사로는 다가올 기사를 해결할 수 없었다. 기사는 매 순간의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기사들이 날마다 새롭고 낯설었다. 경험은 경험되어지지 않고 축적되지 않아서, 늘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질문은 고사하고, 그저 하루하루 이 기사를 끝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글을 몰고 갔다. 질문보다는 패악질에 가까웠다. 질문이 되지 못한 우리의 글은 늘 정처 없이 맴돌았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말은 현실이 아니라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마도 말의 운명인지요. 그래서 삶은, 말을 배반한 삶으로부터 가출하는 수많은 부랑아를 길러내는 것인지요.(김훈)" 언어와 세상 사이에서 늘 방황하던 어느 작가의 비명을 기억하며 늘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세상을 보고 싶다. 이제 다시 질문하는 글을 쓰려 한다.

이상환 기자
이상환 기자 lsang602@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