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박길환(바이오 02) 동문

기자명 김윤수 (kysoosyk@gmail.com)
박길환(바이오 02) 동문 사진 l
박길환(바이오 02) 동문
사진 l 김윤수 기자 kysoosyk29@skkuw.com

 

“자율성이 보장되면서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 변리사더라고요”
사무소 직원에게 특허 출원 관련 서류를 보고 받던
P&K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박길환(바이오 02) 동문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안정적 직장에 내민 사직서
중소기업 어려움 해소 위해 재능기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간 어린 시절
“자랑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주변으로부터 ‘리더십이 있다’는 말을 곧잘 듣곤 했죠.” 마산에서 자란 박 동문의 학창시절을 묻자 그는 친구들의 칭찬을 빌려 입을 뗐다. 친구들과 어울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게 학창 시절의 낙이었던 그는 관심 있는 활동을 직접 기획하는 결단력과 진행하는 추진력이 두드러졌던 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컴퓨터 게임에 관심이 많아 게임 잡지를 읽고 자랐어요. 그때 읽은 잡지처럼 흥미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게 재밌을 것 같아 중학생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직접 학급신문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직접 모임을 만들고 이끄는 모습 덕에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아요.”

한 번 손에 잡힌 일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던 박 동문은 어른들이 말하는 ‘일’에도 관심이 갔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아버지나 삼촌들이 말하던 ‘일하러 간다’에서 그 ‘일’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어요.” 하지만 그에게도 진로 선택은 쉽지 않았다. “하루빨리 취직하고 싶었지만 정작 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대학 진학을 위해 학과설명서를 읽던 그의 눈에 들어온 학과가 바이오메카트로닉스학과였다. “다른 일반 공과대학·자연과학대학의 학과들에 비해 학과 이름이 멋있어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읽게 된 의료기기 관련 학과 커리큘럼 설명을 보고 대단한 일을 하는 학과라는 생각이 들어 진로 걱정은 차치한 채 진학하기로 했죠.”

대학생이 된 그의 모습에서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성격은 잘 드러났다. “입학하고 맨 처음 대계열제 신입생으로 간 OT조 친구들과는 1학년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MT를 갈 정도로 마음이 잘 맞았어요.” 다만 진로 관련 진지한 고민에 소홀해졌다. “4학년 1학기가 되자 취업 준비에는 자격증 준비, 토익 시험 준비를 비롯해 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보였어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이때 그는 다시 한 번 결단력을 드러냈다. “취업에 전념하고자 4월경에 삭발을 했죠. 문제는 한 달 뒤 예정됐던 졸업앨범 촬영을 간과했다는 거였어요. 결과적으로 당시 졸업앨범의 유일한 삭발 졸업생이 됐죠”라며 웃어 보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에 사회 전반에 변리사 시험 준비 열풍이 불었다. “과 선배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고 동기·후배 역시 시험 준비를 위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분위기였죠.” 하지만 변리사에 대한 대학 시절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취직에 대한 욕구는 컸지만, 직업 탐색의 시간에는 소홀해 사실 대학생 때까지는 변리사를 제 진로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었죠.”

부속품이 되기 싫어
가능한 한 빠르게 취직을 목표로 했던 박 동문의 첫 ‘일’은 일본의 산업용 로봇 회사 FANUC KOREA 기술지원팀이었다. “회사 위치도 창원으로 본가와 가깝고 메카트로닉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데다 연봉도 높아 선택했어요. 이처럼 장점들이 많은 직업이었기에 처음 일하던 1년 동안은 많은 것도 배우면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죠.”

하지만 변리사 시험 준비 열풍에도 시큰둥했던 그가 처음으로 변리사를 고려한 시기는 뜻밖에도 만족스럽던 FANUC KOREA 직장생활 때였다. “회사에서 일을 계속해보니 직장생활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회사의 기술 자체가 워낙 좋아 기존의 사업만으로 매출은 보장된 기업이었지만, 신규 사업으로의 확장이 일절 없고 20~30년 넘게 업무 프로세스가 그대로 사용되는 등 보수적인 모습이 보였죠. 젊은 나이였던 만큼 호기로운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경직된 회사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일을 할수록 점점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부속품이 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근무환경에 대해 아쉬움이 많아진 그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하고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다. “어떻게 보면 대학생 때 해야 했던 직업 탐색을 뒤늦게 한 거죠. 고려한 사항은 크게 두 가지로 ‘자율성이 얼마나 확보될 수 있는가’와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였어요. 무언가 주체적으로 기획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생각했기에 관련 직종이 무엇이 있을까 찾아봤어요.”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변리사였다.

진로를 결정한 박 동문은 일사천리로 할 일을 진행했다. “우선 변리사 시험 준비와 회사 생활을 병행했다가는 1차 시험도 붙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사표를 냈어요. ‘시험 결과가 잘 안 되더라도 다른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빨리 나오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죠.”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그는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보통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들을 보면 조용히 잠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저는 주변 지인들에게 전부 알리고 다녔어요. 많은 사람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고자 한 거죠. 그래서 고향 친구, 친인척, 심지어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면서 전 동료들에게까지 알렸어요.” 특단의 조치는 다른 의미로도 그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다. “변리사를 하겠다고 하자 주변의 많은 사람이 걱정을 해주었어요. 이는 제 주변 사람들이 제게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는지를 알게 된 계기가 됐죠. 오히려 앞서 말했듯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니 주변 사람들의 관심도 부담보다는 좋은 동기 부여가 됐어요.” 그의 편한 마음가짐과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주변 사람들의 걱정 덕분인지 몰라도, 약 2년 7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수험생활 끝에 그는 2012년 제49회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의뢰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변리사 시험에 합격하고 연수를 마친 박 동문은 수습 경험을 쌓을 특허 사무소를 선택해야 했다. “많은 취업준비생이 대기업을 선호하듯 대형 특허 법인을 가고자 하는 수습 변리사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직장을 그만둔 이유가 자율성의 보장이었던 만큼 작은 특허사무소에서 직접 제 손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 소형 특허법률사무소에 지원했죠.” 박 동문은 그곳에서 롤 모델을 만나게 됐다. “제가 일했던 ‘대주국제특허법률사무소’ 조영현 대표 변리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불도저 같은 화끈한 성격으로 개업을 상당히 일찍 한 조 변리사의 생활신조에서도 많은 자극을 받은 거죠. 저도 수습 1년을 마치고 바로 개업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따라 했다고 할 수 있죠.”

전공 공부 역시 박 동문의 변리사 업무에 도움이 됐다. “바이오메카트로닉스학과 과정 자체가 융합된 학과다 보니 다양한 분야를 배웠지만, 취업 시 지원 가능 분야가 모호해져 아쉬웠어요. 그런데 개인 사무소를 운영하는 변리사로서는 오히려 취급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는 장점이 됐죠.”

박 동문이 처음으로 이름 석 자를 내걸고 개업을 한 곳은 변리사 사무소로 유명한 서초동과 역삼동이 아닌 광명시였다. “광명시에 있던 누나 집에 살면서 그곳에 변리사 사무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또한 수습 시절 여러 중소기업 사장님들과 창업주분들이 시간은 없는데 직접 강남까지 찾아가는 과정이 불편하다고 토로하시던 게 생각났죠.” 그의 고객을 고려한 사무소의 입지 전략은 주효했다. 결과적으로 10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직원 2명만 데리고 시작했던 사무소는 현재 8명의 직원이 있는 방 3개의 사무실이 됐다.

그에게 기억에 남는 특허 관련 업무나 지식재산권 관련 분쟁 일화를 묻자 “기뻤던 일 하나, 슬펐던 일 하나 해서 총 2개”라고 답했다. “먼저 기뻤던 일은 시스템 코리아라는 시설물을 만드는 업체의 특허 출원 등록 업무였어요. 시스템 코리아가 약 20억 규모의 큰 계약을 앞두고 있었는데 특수계약이기 때문에 관련 기술이 반드시 특허 등록이 돼야만 했어요.” 하지만 당시 그는 의뢰인의 자금 상황이 넉넉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계약을 잡아내기 위해 특허가 등록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계약을 먼저 한 상황이었어요.” 그는 반드시 특허 등록을 해내야만 했지만, 등록을 위해 특허청에 권리를 보좌하는 절차가 진행되기 어려워 보이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러한 위험에 더불어 업무 자체도 의뢰인이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무상으로 그에게 부탁했던 건이었다. “여러 어려움이 있던 사건이었지만 부지런히 발품을 판 끝에 정식 계약 직전에 특허 등록이 이뤄졌어요. 게다가 현재는 해외 6개국에서도 특허 등록이 됐고 해외 계약도 체결돼 승승장구하게 됐죠.” 상장 준비를 할 정도로 큰 기업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그에게 기술 특허 업무를 맡기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다음으로 그는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상표권 분쟁’ 이야기를 했다. “중소기업의 사장님이 자사의 상표를 대기업에서 베껴 상표권 침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어요. 해당 사건에서는 *권리범위 확인심판으로 두 상표권의 권리가 저촉되는지를 판단하는 절차가 있었어요.” 당시 증거 자료를 준비하던 그는 사건 자체만 보면 승소 가능성은 50 대 50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상대는 당장 거리에 나가도 쉽게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대기업이었다. “상대 법률팀은 인원도 10명이 넘는 데다 특허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최정예 법률가들로 구성됐어요. 결국 권리범위 확인심판과 특허법원 소송에서 연이어 패소했어요. 다른 몇 가지 방법이 남아있었지만, 비용문제로 결국에는 중소기업 사장님이 포기하셨죠.”

이 기억 때문이었을까. 박 동문은 2016년부터 매년 ‘소기업·소상공인 경영지원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소기업 대표와 창업주들에게 특허 관련 상담과 지원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여러 중소기업 대표와 창업주들께서 비용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안타까웠어요. 또한 저 역시도 한 소상공인이잖아요. 개업 당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정보원이 필요함을 절감했기에 이를 생각해서라도 다른 분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같은 이유로 그는 지식창업신문의 집필진으로 참여해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재산권 사항들을 소개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마음 편히 후회 없이
그는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마음을 편하게 먹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밝혔다. 세상에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였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서 결과가 좋지 않다면 다른 일을 하면 돼요. 그게 전부에요.” 마지막으로 그는 “명문대 진학의 가장 큰 장점은 롤 모델이 될 만한 선배, 동기, 후배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를 잘 활용해 자신의 자산으로 만든다면 진로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거예요”라며 대학 생활을 허비하지 않기를 당부했다

*권리범위 확인심판=특허권자ㆍ전용실시권자 또는 이해관계인이 특허발명의 보호범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청구하는 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