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 속초 아바이마을

기자명 이상환 기자 (lsang602@skkuw.com)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 아바이마을
이산가족 상봉 신청에서 대부분이 떨어져


거리마다 아바이순대 전문점, 함흥냉면 가게가 가득했다. 음식점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인파는 이어져 마을 앞 해수욕장에 닿았고 그 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등대가 마주보고 있었다. 등대는 서로 멀어 닿지 않을 듯 싶었다. ‘아버지’의 북한말인 ‘아바이’에서 이름을 딴 마을,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 초입의 풍경이다.

지난 3일. 아바이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6·25 때 내려온 실향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휴전된 1953년 1세대 실향민들이 마을에 정착해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이제 실향민들의 아픔도 세월에 풍화됐다. 그 풍화된 슬픔이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요소가 돼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마을에서 아바이순대 식당을 운영하는 이 모 씨는 실향민 2세대다. 1세대 실향민인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제 실향민 1세대의 뒤를 이어 2세들이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 이장 김진국 할아버지는 “북과 멀지 않은 곳에 다들 자리를 잡았다”며 “당시에 금방 통일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마을은 분단의 역사와 시간을 공유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아바이마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음식점이 가득한 한 쪽은 휴일을 맞아 찾은 연인, 가족의 행렬로 붐볐지만, 주택이 밀집한 다른 한쪽 거리는 적막이 감돌았다. 거리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청호동 인구 4500여 명 중 60%가량이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과 그 자손들이다. 실향민 1세대는 대략 100여 명이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지병이 있는 어르신이 많았다. 대외활동을 할 수 있는 어르신은 50여 명이다.

“이제는 대부분 죽고 몇 명 안 남았어.” 마을 골목에서 앉아 있던 김복순 할머니가 말했다. 그는 이 마을의 시작을 함께했다. 북한에서 간호원에 있었다는 그는 “고향은 함경도다. 19세 되던 해에 내려왔다”고 했다. 피란 속에서 부산까지 내려간 그는 휴전이 되자 남편과 함께 아바이마을에 정착했다. 남편인 이 모 할아버지 역시 1·4 후퇴 때 내려왔다. 23세 겨울이었다. 할아버지는 형제와 여동생을 북에 두고 왔다고 한다. “보고는 싶지”라고 말했지만, 이산가족 신청은 하지 않았다. “3시간 만나고 헤어지면 공허해서 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아바이마을 전경 모습.
아바이마을 전경 모습.
사진 | 이상환 기자 lsang602@skkuw.com


마을 노인회관에서 노인들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실향민이다. 마을 이장인 김진국 할아버지도 실향민이다. 12세 때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내려왔다. 그는 먼 겨울을 회상했다. 북으로 올라가던 연합군이 중공군에게 막혀 철수하던 때였다. 그는 “아바이마을 사람 대부분이 1·4후퇴 때 내려왔다”며 “작은 배에 내 고향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탔어. 정신없고 추웠지”라고 말했다. 그의 고향은 함경도 북청군이었다. 기억도 시간에 풍화되는 것이어서 그는 기억나는 바가 많이 없다고 했다. 다만, “겨울에 눈 내리던 인민학교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며 “언젠가 고향에 다시 한번 가고 싶다”고 전했다.

김 이장 옆에 있던 이 모 할아버지는 몇 해 전 북에 있던 가족을 만났다. 2010년 이산가족 상봉 때였다. 마을의 이산가족 중 이산가족 상봉에 성공한 어르신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요즘 남북 관계가 좋아져 가능 할 것도 같은데, 이러다 다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지 않았냐”고 했다. 그래도 “죽기 전 형제들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다. 노인들의 기억에는 분단의 무늬가 있었다. 이 마을의 노인들은 평화가 와 언젠가 고향에 가기를 바랐다.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이 노인회관에 모여 있다.
사진 | 이상환 기자 lsang602@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