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미 떡볶이’ 지정인 부사장

기자명 김원구 (kwg0328@skkuw.com)
우리 학교 정문에 있는 '나누미 떡볶이' 전경. 분주히 떡볶이를 만들고 있다.
우리 학교 정문에 있는 '나누미 떡볶이' 전경. 분주히 떡볶이를 만들고 있다.

 
28년 동안 2대째 자리 지켜
“성대 옆에 오래오래 남고 싶다”


휴일 저녁, ‘나누미 떡볶이’는 그릇에 가득 담긴 떡볶이를 나눠 먹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28년째 성대 옆에서 장사하고 있어요.” 떡볶이 그릇이 비워지면서 가게가 한산해지자, 지정인(45) 부사장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먹어서 몰랐는데 친구들이 팔아도 될 정도라 하더라고요.” 지금의 나누미 떡볶이는 지 씨의 어머니가 개발했고, 어머니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떡볶이 가게를 열었다. 어머니가 떡볶이를 맛있게 만들어서인지, 지 씨는 어렸을 때부터 위염이 생길 정도로 떡볶이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떡볶이를 먹고 무슨 재료가 들어갔고, 어느 가게 떡볶이라고 알아낼 정도여서 친구들이 저를 ‘떡볶이 감별사’라고 불렀어요.” 떡볶이를 맛있게 만드는 엄마와 떡볶이를 좋아하는 딸. 2대째 나누미 떡볶이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다.

나누미 떡볶이는 1990년대부터 여러 매체에서 떡볶이 맛집으로 빠지지 않고 소개됐다. 이에 대해 지 씨는 “우리 떡볶이는 ‘국민떡볶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매콤달콤한 대중적인 맛이기 때문이죠.” 지 씨의 떡볶이 철학 또한 남다르다. 우리나라 재료로 만들어야 맛있는 떡볶이가 만들어진다. “쌀도 그렇고 고춧가루도 그렇고, 재료가 국산이어야 좋은 맛을 내죠.” 한편 탕수육의 부먹과 찍먹처럼, 떡볶이도 쌀떡과 밀떡으로 기호가 나뉜다. 나누미 떡볶이는 쌀 떡볶이다. 지 씨가 쌀떡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쌀’ 위주로 식문화가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빵보다 밥이 소화가 더 잘되기 때문에 밀떡보다는 쌀떡을 선택했어요.” 쌀 떡볶이를 선택한 현실적 이유도 있다. 밀떡은 포장해서 나가면 불어 버리지만, 쌀떡은 불지 않아 뜨거울 때 먹으면 부드럽고 차가울 때 먹으면 쫀득하다. 나누미 떡볶이는 떡볶이 못지않게 어묵도 유명하다. “부산의 한 회사에서 28년째 어묵을 비행기로 직송 받고 있어 변하지 않는 맛을 내고 있죠.” 어묵 국물은 떡볶이 밑간에도 쓰여 떡볶이에 맛을 더한다.

자주 찾아오는 손님들은 주로 누구냐는 질문에 지 씨는 미소 지으며 가게 안을 가리켰다. 떡볶이, 어묵, 순대, 김밥 세트처럼 가게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앉아있었다. “학교 다닐 때 오시던 분이 결혼해서 애들 손 잡고도 오세요. 또 오랜만에 귀국해 캐리어를 들고 바로 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나누미 떡볶이에는 학우들의 추억이 어묵 국물처럼 우러나있다. 지 씨는 과거 학생운동으로 유명했던 우리 학교에 얽힌 일화를 명절날 조카들에게 이야기해주듯 말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성균관로를 가득 메우면 최루탄이 날아와 가스가 가게 안을 뒤덮었는데, 그럴 때면 그날 장사를 다 접어야 했어요.”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고, 그 학생들이 40대가 돼 가족들과 다시 가게를 찾는다. 그들이 ‘그때 저 깃대 들었어요’ 혹은 ‘장사 못 하셔서 많이 힘드셨죠’라고 하면, 지 씨가 ‘그때 저희 장사 못 해서 힘들었다' 며 장난스레 받아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나 뭉클해요.”

28년째 성대 앞을 지킨 나누미 떡볶이에게 성대생들은 어떤 존재일까. 지 씨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단번에 대답했다. “이 자리에 오래 있던 만큼, 학생들 때문에 울고 웃은 추억이 많다.” 지 씨는 학우들에게 받은 고마움을 되돌려주고 싶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우를 위해 우리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나누미 떡볶이의 목표는 학우들에게 맛있는 떡볶이를 오래도록 파는 일이다. “지금 학생분들도 나중에 커서 다시 방문했을 때 가게가 여전하다면 얼마나 반갑겠어요. 성대 옆에 오래오래 남고 싶어요.” 몇십 년이 지나도 나누미 떡볶이는 성균관로에서 진하게 우러난 어묵 국물과 함께 추억 묻은 떡볶이를 우리에게 팔고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