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 qwertys@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 qwertys@

4대 성현이 어느 분인지는 몰라도 ‘방탄소년단’ 멤버는 다 알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본래 4대 성현은 지적 솔직성의 상징이며 자기완성의 롤 모델이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절대적 진리의 대상이었던 4대 성현은 물론 신에 대한 믿음도 예전만 못하다. 누군가는 플라톤이 제기한 변할 수 없는 진리인 이데아의 세상은 가짜이고, 몸으로 느끼는 세상이 진짜라고 웅변한다. 그러므로 몸으로 느끼는 세상에서 진리나 개념은 웃기는 일이 되고 그것의 짝패인 은유가 강조되며 예술과 과학은 격상된다. 니체의 말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에 기반해 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는 ‘또 하나의 시작’으로 ‘최후의 신’을 내세운다. 그것은 신이 없는 삶은 공허할 것이라는 종교인들의 인식에 반기를 들며 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 보인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 전문가인 허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새로운 신’에 대한 유비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신’은 1960년대 음악으로 암시되는 것이다. 당시에 밥 딜런과 비틀즈와 같은 록 그룹들은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던져주었다. 이것은 록 페스티벌의 효시인 1969년 우드스톡 음악축제의 문화적 패러다임과 결합한다.

현대의 새로운 개인주의는 미래의 일부가 될 새로운 자기 이미지를 환상적으로나마 창조하고 싶어 한다. 환상은 인간 주체의 불안을 막아 주는 것이라고 하듯이, 선망스런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는 자아-이상과의 동일시는 우리가 직면한 불안에 대한 도피 방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기로 되어가기의 욕망에 부합한다. 그래서 자아-이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새로운 신’과 같은 대상을 찾는다. 누가 뭐라 해도 ‘방탄소년단’은 ‘새로운 신’의 유비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방탄소년단의 음악 속에서 꿈을 꾸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치유를 구한다. 세계를 갱신할 만한 문화적 사건만이 우리를 자족적인 허무주의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공언하는 것은 위험한 말이지만, 분명히 방탄소년단은 우드스톡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새로운 신’의 사례로 제시될 수 있다.  

4대 성현에게는 기의만 중요할 뿐 기표는 배제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과학은 기표를 중시한다. ‘방탄소년단’은 예술과 새로운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의 산물이다. 모든 예술은 기표의 유희라고 주장한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표현뿐!! 니체는 너의 삶의 주인은 네가 되어라, 스스로 룰을 만들어 자신에게 완벽한 주체가 되라고 강변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방탄소년단’은 유엔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사실 4대 성현 중의 하나인 소크라테스가 “자기 이해는 신의 지식을 산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나에게 잠재해 있는 가능성이 ‘새로운 신’이 아닐까? 첨언한다면 그런 가능성은 공부 잘하는 능력만으로 찾지 말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몸과 결부된 것에서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진리란 무엇일까라고 니체는 되묻는다. ‘방탄소년단’처럼 개념화될 수 없는 것들을 기표로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안상혁 교수 영상영화과
안상혁 교수
영상영화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