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우연수 (daleksupreme@naver.com)


프로이트의 『에고와 이드』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 반응은 두 가지다. 첫번째, 애도(mourning) 작업을 통해 상실의 대상을 나로부터 밀어낸다. 그에게 투자하던 리비도를 이제는 회수하고, 빈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꾼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식의 매정한 극복이다. 그러나 두번째, 우울증은 떠난 대상을 정말로 떠나보내기는커녕 보유하려 한다. 그것을 스스로에 은신시키고, 끊임없이 내면화하며, 에고와 합체해버림으로써 에고의 일부로 만든다. 그런데 우울증은 무의식적이어서 정확히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적어도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상실의 대상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해 리비도는 에고에 갇혀버린다. 이런 식으로 에고에 도피해버리는 것은 자기 비하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유지되는 애도와 다르게, 우울증은 사랑을 증오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피가학성으로 보이는 이 감정은 사실 대상을 향한 증오를 자신에게 돌리는, 나르시시즘적인 가학성인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 자체가 우울증적으로 형성된다고 봤다. 금지된 성적 경향이 주체의 일부를 구성해버린 탓에 그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대신에 부정의 방식으로 젠더를 구성하게 된다. 애도해야 할 대상/성향을 애도하지 못할 때 주체는 오히려 그것을 내면화하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한 권력에 도전하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 스스로가 학술부 기자라고 할 때 느끼는 우울감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겨우 정기자면서 이런 말투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마는, 무엇을, 왜 쓰기 위해 들어왔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모든 물음표들이 종국에 나를 향하고 있음은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다. 나는 알고서 모른체 하고 있다. 마땅히 사회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까지 학술적으로 읽고자 하는 바람은, 내 자신을 향해 도망가고 싶다는 욕구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하다. 내가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퀴어한/이상한 방식으로 써보겠다는 시도는 자기 비하적이고 자기애적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똑바로 가려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모든 글자들이 계속해서 ‘나’에게로 회귀하는 일은 우울하다. 이 우울증적인, 학술부적인 정체성.
 

우연수 기자coincidence_number@skkuw.com
우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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