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우리의 옛모습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 2일 600주년기념관 3층 제1회의실과 6층 첨단강의실에서는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3국의 한국인식’이란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번 학술회의는 근대 이래 동아시아 주요국가인 중국, 일본 및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형성을 역사 문화적인 맥락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를 통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인접 국가간의 관계를 되새기며 바람직한 동아시아학을 전망해 보았다. 여러 주제발표 가운데 중·일·러 각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후세 다츠시(布施辰治)의 한국인식 - 이규수

후세 다츠시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절 일본내의 사회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직접 나선 일본의 한 변호사이다. 식민지 국가를 바라보는 침략국의 시각을 양국 사이에 일어난 재판을 통해 살펴보는 것은 큰 의의를 지닌다. 그는 관동대지진 등 당시 한국인들과 관련된 사건에서 한국인들의 인권보호에 일조했다. 또한 후세 다츠시는 식민지 조선문제를 조선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즉 조선문제는 세계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며 전 인류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덧붙여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며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란다고 그의 어록은 전한다.

식민지 사관에 반해 그가 보였던 이러한 언행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과 일본간의 묵은 감정들을 풀어나가는 하나의 열쇠라고 본다. 그의 장례식장에 모인 수많은 한국인들은 그를 ‘일본무산운동의 맹장’이라고 평가했다. 국가를 초월하는 후세 다츠시의 일생은 새로운 한·일관계 정립에 밑받침이 되리라 본다.

■ 곤차로프의 여행기 『전함 팔라다』에 비친 한국 - 이희수

여행기『전함 팔라다』의 작가 곤차로프는 러시아 사람들 중에서 최초로 한국땅을 밟은 19세기 러시아인이다. 종전까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이 여행기의 소재가 되는 한국은 한층 더 부각되리라 본다. 전함 팔라다의 항해에서 한국은 영국, 대서양, 인도양 등을 거쳐 러시아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방문국이었다. 이 여행기에 내비쳐진 한국의 인상은 그리 밝지 않은 편이다. 이는 아마도 곤차로프의 한국에 대한 편견이 작용되었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런 편견들은 그가 한국인들을 접하면서 바뀌게 된다. 외국인들의 질문에 적극적이고 진솔하게 답하는 한국인을 보며 긍정적이고 개방적이어서 빠른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평가한다.

콘차로프는 하나의 국가를 보는 주된 관심을 단순히 이국의 정취가 아닌 민족의 자산, 힘과 잠재력에 두었다. 그러한 점에서 냉담하고 건조한 그의 평가는 미래 한국의 모습까지 예상했었는지도 모른다. 이 여행기가 비단 한편의 모험서라는 문학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한·러간의 보다 나은 관계로 나아가는데 주춧돌이 됐으면 한다.

■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중국공산당 - 손승회

만보산사건은 1931년 7월 만주 조선인의 현지 토지 임대와 농수로 건설을 둘러싸고 펼쳐진 중국인과 조선인의 충돌에서 비롯됐다. 이에 일본은 조선인 보호를 명분으로 사건에 개입했고 사태는 일본 및 조선의 중국배척운동으로까지 연결됐다. 이로 말미암아 근대 동아시아 한·중·일은 각자의 입장을 내세운 채 충돌해 상호간의 새로운 정서를 이해하는데 구체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만주에 살고있던 조선족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조선인이 일본의 사주에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각종 불법행위를 자행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으로 만주 조선인에 대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차별통제 구축정책’ 등은 양국관계에 불씨로 작용했다. 물론, 일제의 직접적 지배를 받고 있었던 조선이나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있던 중국, 이 두 나라가 반일연대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위와 같은 사태는 쌍방이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만보산사건에 대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각기 다른 이견을 제시하며 대립했던 것이다. 간략하게 말해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이 사태의 원인이 일제의 계획적 움직임이란 사실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경우 국민당을 향해 민족주의와 관련한 부분에 계속된 이견 차를 보이면서 자신의 정치적, 조직적 영향력을 확대하려했다.

만보산사건과 중국공산당의 이와 같은 역사적 일례는 당시 한·중·일 삼국사이의 관계와 한국에 대한 인식을 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첨예한 대립이 서로로 하여금 갈등의 구조를 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문화방면에 드러났던 동양 3국의 한국인식을 살펴본 이번 학술회의가 앞으로 주변국과의 관계정립에 도움이 되길 기대해본다.

이철우 기자 fecow@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