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연극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최치언 작·연출)에서 벌어지는 촌극은 80년대 '용감한 시민상'에서 비롯된다. 심야극장에서 벌어진 작은 해프닝은 강도의 칼부림과 그것을 제압한 용감한 시민의 일화로 변질된다. 억울하게 징역살이를 하게 된 이오구는 출소 후 용감한 시민 김두관을 찾아가 부디 칼로 찌르게 해달라고 읍소한다. 없었던 일을 일어난 일로 바꿔야만 자신의 억울함이 풀린다는 것이다.

본래 <어쩌나…>의 원제는 <용감한 시민>이었다. 프로덕션 노트는 ‘용감한 시민’이라는 제목의 적절성에 대해 언급하며 이 작품이 “시대가 지웠고 다시 시대가 요구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용기 외에도 이 작품에 ‘용감한 시민’이라는 제목이 좀 더 적절했을 수 있었던 까닭이 있다. 이 작품은 용기 외에도 용감한 ‘시민’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나…>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규정할 수 없는 두 사람의 30년을 전시한다. 이오구와 김두관은 국가에 의해 각각 강도와 용감한 시민으로 호명되어 선전도구로 활용되고, 거짓 자수간첩과 거짓 귀순용사로 재활용된다. 그러나 진짜 귀순용사 김판돌의 등장으로 그들은 새로운 시민보다도 못한 존재로 추락한다. 내가 누구인지 호소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이들은 부평초처럼 떠다닐 뿐이다.

이오구가 할 수 있는 존재증명의 방식은 김두관을 찔러 자신이 호구가 아님을 보이는 것밖에 없다. 호구가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그가 바라는 전부이자 인간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한편 김두관은 이오구와 달리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것을 요구하지 않은 채 주어지는 것만을 받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가 잡는 트로피, 꽃다발, 칼 그 어느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은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의 손에 들려졌다.

원작 속 김두관과 이오구는 서로를 동시에 찔러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지만 공연은 광화문의 한복판에서 이야기를 끝낸다. 이를 통해 80년대에서 시작되어 80년대의 사람들(의 칼부림)로 끝나는 원작의 이야기는 80년대와 2016년을 잇는 이야기가 된다. 30년간 이어진 두 사람의 쫓고 쫓김은 그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도 벌어진 적이 없으나 마지막 순간만큼은 특정한 장소인 광화문에서 벌어진다. 이오구는 이토록 용감한 시민들이 많았다는 깨달음에 멈춘다. 김두관은 시민들의 촛불을 이어받기 위해 멈춘다. 국가와 타인이 규정한 이름 안에서만 살았던 그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붙잡은 순간이다. 멈춤은 두 사람을 촛불 속 시민으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공연은 국가에 의해 부정당하던 두 사람이 드디어 ‘시민들’로 거듭나는 장면에서 끝마친다.

시대가 가하는 폭력에 대한 이 이야기가 마냥 처절하고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시종 극이 유지하는 가벼움에서 비롯된다. 작품 속 쓴웃음 섞인 농담은 슬픔을 웃음으로 토해내는 최치언의 애도와 위로의 방식이다. 이번 작품에서 최치언이 건네는 위로는 80년대를 살아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향한다. 그들이 더 이상 시대 아래 아프지 않고, 한 사람의 용감한 시민으로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금보현(일반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