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TMI’(Too much information의 줄임말)는 ‘너무 많은 정보를 말하지 마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면도했거나 고모의 혈액형이 B형이라는 내용은 나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다. 이런 쓸데없는 정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TMI’를 외친다. 나는 TMI가 아주 괜찮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TMI’를 사용하여 대화를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남용하면 독이 있는 법. TMI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절친한 친구들과의 대화는 ‘TMI’ 파티에서 시작된다. 만약 서로가 관심사를 모두 알고 있다면, TMI 파티를 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관심 주제만 얘기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관심사를 모두 알지 못한다. 그래서 대화는 누군가가 ‘TMI’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며 흘러간다. 웃음 바이러스가 퍼진다. 생각이 깊어지기도 한다. 너무 남에게만 치중된 얘기나 너무 쓸데없는 얘기는 알아서 걸러진다. 그렇게 서로를 더욱 알아간다.

내가 툭 던진 주제는 ‘TMI’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TMI’가 될 수 있는 소재들로 시작된다. 따라서 'TMI'에 관대해지지 않으면, 대화는 아예 시작되지 못할 수도 있다. ‘TMI’의 남용은 대화의 시작을 막고, 서로 간의 공감을 해칠 수도 있다. 더불어 ‘TMI’ 남용은 자기 검열을 강화하게 만든다. 강화된 자기 검열은 대화를 잃게 만들고, 서로를 더 모르는 상태로 이끌고 간다. 어쩌면 ‘TMI’는 갈수록 심화되는 개인주의의 단면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의 정보는 차단하고, 나의 정보는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TMI’ 포비아가 만연한 상황에서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겠는가? 생산적인 주제가 충분히 될 수 있는 소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으니 빛을 발할 수 없다. 한두 개씩 던져진 소재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TMI’의 남용은 공감대가 부족할수록 강화된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서 회사에서 겪었던 일은 'TMI'의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일 자체는 다른 세계의 일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흥미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억지로 그 얘기를 들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대하는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지는 않을까? ‘흥미가 유발되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님의 얘기를 잘라버리면,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가 원활해질 수 있을까? 또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내 주변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우리에게 인내와 공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례한 주제는 있을지 몰라도, 말하지 않아야 할 주제는 없다. 초반에 언급했던 면도나 고모의 혈액형도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다. 나의 경우, 글 쓰는 소재를 고를 때 영감이 되는 일은 대개 ‘TMI’다. 얼마든지 TMI를 외칠 수 있었던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공감하려 노력한 결과 상대방의 경험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 주었다. 나는 이 과정을 거쳐 쓴 글을 보며 기뻤다. 첫째는 상대방의 사적인 얘기를 나한테 해주었다는 것, 둘째는 내가 겪지 못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과정이 공감을 나누며 서로 간에 유대를 쌓았다는 증명이기 때문에 가장 기뻤다.

‘TMI’는 남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다. 특정 단어가 집단적으로 사용된다면,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TMI'는 개인의 고립을 강화하고, 서로 간의 공감과 대화를 없애는 단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삶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박준규(경제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