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한 카페 화장실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화장실 칸막이는 단 두 개인데 하나는 여자 전용, 하나는 남녀공용이다. ‘카페에 여자 손님이 많아서 그렇겠지’라는 결론을 짓고 볼일을 봤으나 생경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무심코 지나갔겠지만 이제는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가 그렇다. 그렇다. 젠더 프레임의 덫에 깊숙이 빠져 있는 꼴이다.
젠더대립의 시대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수업에서 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 시대의 종언은 최소한 당신들이 부모세대가 된 이후에나 기대해볼 만하다”며 씁쓸해했다. 아직 그것을 논할 단계는 아니지만 대립의 골은 깊어 보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끊임없이 오가는 이 진흙탕 싸움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로는 물고 물린다. 유명 래퍼, 정치인, 각종 언론도 합세해 판을 키운 이수역 폭행 사건도 그중 하나다.
새벽 시간대에 일어난 취객 간의 쌍방 폭행이지만 언론도 대중도 젠더 프레임의 구도로만 사건을 재단한다. 각자의 기호대로 정보를 가공하고 취사 선택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실은 실종되고 만다. ‘남혐’과 ‘여혐’의 구호를 너무나 쉽고 빠르게 가져다 외치며 여론을 호도하는데 폭행 사건이 소비될 뿐이다.
프레임 속 누군가의 입장만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대중, 그 대중에게 먹잇감을 넣어주는 언론이 있다. 일단 누군가가 ‘저지르고 나 몰라라’하는 식으로 행동하면 같은 프레임을 공유하는 대중과 언론은 열심히 그것의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비단 폭행 사건뿐만 아니라 일자리, 가사노동 등 일상적 사안에 대한 논의도 젠더 프레임 안에 갇혀있다. 그 논의가 무익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해석만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역감정이나 귀족 노조 등의 각종 프레임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면서 구조적인 문제를 숙고하게끔 만들기보다 불필요한 논쟁만 가열시킨 역사가 있지 않은가. 이수역 폭행 사건에서 보이는 남녀의 대립 구도도 그 전철을 밟게 될 공산이 크다. 프레임이라는 것은 결국 현실을 뚫고 나와 누군가를 공격하는데 사용될 수 있기에 위험하다.
한편 한 시사주간지에서 동국대 권상집 교수는 ‘성적 가해 또는 폭행 등을 어떤 사람들이 더 많이 일으킬까’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다. 그는 “성적 가해 또는 폭행 등은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상대보다 좀 더 막강한 힘을 가졌다고 인식할 때 더 많이 발생한다는 점을 연구진은 확인했다”고 전한다.
젠더 프레임에서 벗어난 접근으로 볼 수 있는 의제는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프레임에 속박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사건을 조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쉽지는 않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 21세기에 괜한 참견이 아닌가도 싶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을 종합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우리는 프레임을 내려놓고 말을 아끼며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겪은 끔찍한 운명을 우리 사회가 경험하지 않는 방법이고, 괴물같이 진화하고 있는 ‘남혐’과 ‘여혐’의 종언을 고할 수 있는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