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 15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문화재가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문화재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조차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사람들이 얼마나 문화재 보존의식이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위와 같은 도난 외에도 석굴암과 같이 무지나 무관심으로 인해 훼손되는 문화재들이 많은 것도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이처럼 역사의 흔적들에 대한 중요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소홀히 취급해 많은 문제점을 낳는다. 가까이 서울에도 비슷한 예가 있는데 바로 서대문 형무소이다.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형태로 독립공원 내에 일부 존재하는 서대문 형무소는 88년 2월 27일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수감 가능인원은 3천2백명, 1908년 문을 연후 80년 동안 약 35만명을 수감했다. 준공 당시는 4백80평, 청사 80평의 규모였지만 1923년, 1935년 차례로 증축돼 3천명정도를 수감할 수 있는 감옥이 됐다. 그 당시 전국 8개도의 감옥이 총 3백평 정도였기 때문에 서대문형무소는 준공당시에도 엄청난 규모의 감옥이었다. 형무소는 △붉은 담벽 △감시탑 △감방(남사·여사·외국인사) △사형장 △일반사무실 △공장 △교회당 등으로 이뤄져있으며, 감방 중 7동, 8동, 10동, 11동 등은 감시하기 용이하도록 부채꼴 모양으로 세워졌다. 감시하기는 편하지만 지내는 사람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모양인 까닭에 1년 내내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도 있어 피부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곳에는 △김구 △김창숙 △유관순 △안창호 △손병희 △한용운 △강우규 △송학선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징역을 살았다. 또한 이 곳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 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투사들이 갇혀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의 형태는 원형과 많이 다르다. 원래 서대문 형무소의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는데 현재는 7개 동만이 남아있다. 1987년 11월 전두환 정권이 ‘서울구치소’의 이전을 결정함에 따라 서대문 형무소의 80년간 감옥으로써 역사적 의미는 끝났다. 이후 이 곳의 처분을 두고 ‘건물·토지 합해 2백70억원에 공매’키로 결정했다가 공원으로 활용한다고 번복했지만 뜻이 있는 사람들이 ‘서대문 형무소의 원형보존’을 외쳤다. 90년 3월 24일 MBC ‘여론의 광장’에서 ‘보존이냐 파괴냐’ 열띤 공방이 오고갔지만 그 자리에서 한 국회의원이 “이 곳은 선열들만 계셨던 곳이 아니라 그 외 여러 범죄자들도 있었던 형무소이기 때문에 전체보존의 뜻이 없다”고 말했고 서울시는 결국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두 쪽의 의견이 치열했던 덕분인지 서대문 형무소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남았다.

이와 관련 서대문 형무소 원형보존에 힘써온 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김국주) 정준영 자문은 “독립기념관이 조화(造花)인데 비해 서대문 형무소는 그 자체로 우리나라 최후의 순국현장”이라며 “원형 그대로 보존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비슷한 곳으로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일본의 원폭돔 등은 원형을 유지한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있다.

정자문은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가능한 한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시켜야한다”며 “평화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길 수 있는 장소로서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임진아 기자 kredo@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