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세종문화회관 허난영 공연기획팀장

기자명 박예나 (yena0710@naver.com)
사진 | 이채홍 기자 lchong@
세종문화회관 허난영 공연기획팀장
사진 | 이채홍 기자 lchong@


무대 뒤, 대립·투쟁의 역사 펼쳐져
공연 기획, 예술·사람 사랑해야 해

 

“공연장은 여전히 사람의 존중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찬바람 불던 지난 토요일, 예술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따스해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허난영 공연기획자를 만났다. 그가 생각하는 공연 기획의 의미와 가치를 들어봤다.

우리 학교 한국철학과를 나왔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
원래는 역사 탐험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1지망으로 사학과를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2지망인 한국철학과를 들어갔죠. 당시에는 펑펑 울고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며 부모님께 재수를 시켜달라고 그랬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대학에 붙은 게 어디냐며 등록을 해주셔서 1년을 다니다 결국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반수를 했어요. 하지만 또 한 번의 실패를 겪으면서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 계기로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됐는데 학교나 사회에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후 공부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동기, 선배들과 학생자치, 사회, 역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학 시절을 보냈어요. 특히 한국사에 관심이 가서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어요. 원해서 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아가면서 그때 배웠던, 생각했던, 고민했던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또,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할지’와 같이 인생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릴 때 나만의 기준을 가질 수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참 좋은, 도움이 많이 됐던 대학 시절인 것 같아요.

어떻게 공연기획자가 됐나.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역사 탐험가가 돼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가보는 게 꿈이었어요. 한 잡지에서 마야 문명의 성이 너무 견고해 면도날조차 들어가지 않는다며 10대 불가사의로 소개하는 것을 보고 ‘꼭 가봐야겠다’, ‘세계를 돌아다녀 봐야지’라는 다짐을 했죠. 그런데 인생이 계획되거나 준비된 대로 흘러가진 않았어요. 역사학자라는 첫 꿈이 무너지고 대학생활 6년 끝에 졸업을 했어요. 취직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가 온 거죠.

바로 공연기획자가 된 것은 아니에요. 처음에는 공무원 시험을 봐서 4년간 근무했죠. 그런데 틀에 박혀 정형화된 공무원의 행정조직은 저한테 맞지 않았어요. 4년 동안 근무지를 옮겨다니다 결국은 그만뒀어요. 마침 세종문화회관에서 채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돼 지원하게 됐어요. 세종문화회관은 면접을 볼 때서야 처음 가봤어요. 공연장을 보고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라는 놀라움을 느꼈죠. 세종문화회관의 공연기획자가 돼 본격적으로 일을 하며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조명, 음악, 무대 세트 제작 등을 조율하고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감탄했어요. 무대에서 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러한 느낌은 처음에 역사 탐험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직감이 온 거죠.

공연 기획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사람들은 보통 ‘공연 기획’이라 하면 떠올리는 환상 같은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좀 달라요. 무대 뒤에서 정말 많은 스텝들을 조율하고 끊임없이 싸우며 예술가들이 요구하는 것을 조정하고 정리해야 하죠. 이러한 대립의 과정, 투쟁의 역사가 상당히 스릴 있어요. 또, 뒤에서는 끊임없이 대립하고 싸워나가지만 무대 앞에서는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공연을 선사하는 것이 모순적이잖아요. 이 모순적인 모습에서 오는 자기만족이 있어요. 그러면서 더욱 깊이 빠져든 것 같아요.

공연기획자로서 어떤 노력을 했나.
예술가들의 감성을 다 받아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한계를 장점으로 바꾸고자 노력했어요. 기획자는 냉정하게 상황을 객관화할 필요가 있거든요. 경쟁적 측면에서의 리스크 정리와 트렌드를 읽는 경영적 측면으로의 접근이 제 강점이 돼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기획팀장을 오래 맡을 수 있었어요. 또, 남들보다 조금 부족할 수 있는 예술적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성균관대학교 예술학협동과정에서 석·박사 학위를 획득하기도 했어요. 공연기획팀장직을 맡으면서부터는 프로그램의 장르적인 측면보다 극장의 브랜드를 높이기 위한 극장 전체의 프로그램을 관리했어요. 세종문화회관 내부에서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하는 좋은 공연들을 유치해오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죠.

지금까지 기획한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베르디 빅5’예요. 베르디의 작품 다섯 개를 1년에 두 개씩, 총 3년 동안 공연했어요. 예술 감독과도 호흡이 잘 맞아서 즐겁게 작업했죠. 오케스트라, 성악, 무대 세트, 의상 준비 등 상당히 많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는데 이러한 기획을 총괄적으로 맡으며 예술이 참 많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올해에도 세종문화회관 개관 4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으로 조수미 선생님의 공연과 유니버스 발레단의 공연을 기획했는데, 3000석 중 2500석 이상이 예매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요. 이 두 작품은 10년이 지나서도 생각날 것 같아요.

허난영 공연기획자에 의해 기획돼 지난 5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조수미와 로베르토 알라냐의 ‘디바&디바 콘서트’.
‘베르디 빅5’ 오페라 프로젝트 중 ‘돈카를로’ 공연 후 기념사진.

 

공연을 기획하며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나.
스텝 간에 심한 갈등이 생긴 적이 있었어요. 결국 공연하기 일주일 전쯤 공연자들에게 의상을 입혀봐야 하는 마무리 단계에서 의상 제작자가 화를 내며 옷을 다 들고 가버렸어요. 리허설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직접 의상 제작자를 찾아가 하소연을 8시간 동안 들어주고 타협한 뒤 옷을 찾아왔어요. 이미 표가 판매된 상황에서 진행이 중지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하느라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나요. 

공연 기획을 하며 느끼는 보람에 대해 말해 달라.
사람들이 각박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기쁨과 희망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점이 보람차요. 본질을 잊고 유혹에 빠지지만 않으면 공연 기획 일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직종 중 참 가치 있는 직종인 것 같아요. 특히 일반 회사와 달리 나의 판단, 나의 생각, 내가 생각해내는 아이디어나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껴요.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예술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연 기획을 하며 제 인생이 완전히 전환된 것 같아요. 당시에는 공연기획자로 일하는 것이 예기치 못한 결과여서 축복인 것 같기도, 이 직장을 5년 이상 다닐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거든요. 예전에는 어딘가에 얽매인 정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 탓에 결국에는 자유로운 회사를 차려 개인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직장에서 20년을 보낸 것을 보면 공연, 예술이라는 게 참 자유롭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요.

허난영 공연기획자에 의해 기획돼 지난 5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조수미와 로베르토 알라냐의 ‘디바&디바 콘서트’.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지난 20년 동안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프로그램 기획보다는 공연 기획에 대한 많은 후배들의 꿈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리더가 되고 싶어요. 또, 우리 세종문화회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고, 좋은 공연이 이뤄지는 공간이라고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공연기획자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연장은 사람이 중요하고 소중하며 사람의 접촉을 통해 만들어지는, 여전히 사람의 존중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공연 기획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예술뿐만 아니라 사람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또, 많은 것을 경험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찾아보면 공연 기관들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들이 많아요. 이들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지원, 접촉하면 좋겠어요. 바로 꿈을 이룰 수 없더라도 결국은 돌아서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게 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