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며
1905년 11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며
  • 성대신문
  • 승인 2018.12.03 16:01
  • 호수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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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이 뤼순 항에 정박한 러시아 해군을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이미 전쟁 전부터 세계의 이목은 일본과 러시아, 대한제국에 집중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와는 달리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주목받았는데, 바로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대한제국의 존망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런던에서는 전쟁을 두고 내기가 한창이었는데, 누가 이기느냐를 두고 건 내기가 아니라 러시아가 얼마나 빨리 이길 것인가를 두고 내기가 걸리고 있었을 정도로 러시아의 승전,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한편 대한제국은 1895년 일본에 의해 황후가 시해당한 이래 줄곧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쟁으로 나라의 운명이 갈린다는 것은 황제 고종과 그 관료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외국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러시아와 연합할 구상을 하거나, 짜르의 궁정에 승전 축하 사절을 보낼 생각도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전시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인천으로 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해버렸다.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는 러시아 공사관의 관리 및 업무 일체를 프랑스 공사관에 위탁하고 프랑스 군함을 타고 대한제국을 떠났다.

그렇게 1년도 더 지난 1905년 9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이 러시아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미국의 주선으로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일본이 절대적인 권리를 확보했다.

일본은 자신들을 견제하고 몰아내기 위해 대한제국이 계속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상황이 틀어진다는 판단을 내렸다. 두 번이나 전쟁을 벌여 막대한 전비를 써가며 청과 러시아를 힘들게 몰아냈지만, 대한제국이 다음엔 또 어느 나라를 끌어들여 전쟁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결론은 대한제국이 멋대로 외국을 끌어들이지 못하게 아예 외교권을 빼앗자는 것으로 모아진다.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미국과는 필리핀을 대상으로 흥정을 하고, 기존 동맹국인 영국과는 인도를 대상으로 빅딜을 하는 작업을 해둔다. 그리고 러시아가 물러나자 바로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1905년 11월, 대한제국에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한다. 이토는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경운궁으로 들어가 조약을 체결하도록 고종과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웬만한 일은 협박이 통했지만 외교권을 가져가겠다는 이 조약에 대해서만큼은 고종이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협박이 소용없었다.

그러나 이토는 계속 고종에게 알현을 요청하여 조약에 동의할 것을 주장했다. 고종은 처음에는 대신들과 인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으나,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가 아니냐는 이토의 반문에 대신들과 논의하여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이토는 이를 결정권을 대신들에게 넘긴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와 일본 공사관으로 누차 불러 조약 체결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지만, 훗날 을사오적이 되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포함하여 모든 대신들이 확실하게 답을 주지 않았다.

대한문 왼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쭉 걸어가 미국 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를 지나면 정동극장이 있다. 정동극장에서 예원학교로 가는 사이에 작은 골목길이 하나 있는데 그 골목길로 들어가면 2층의 붉은 벽돌건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이 건물은 바로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된 중명전이다. 원래 경운궁에 속한 건물로 고종의 서재로 건축되었는데, 1905년 11월 17일 밤 이토와 대한제국의 대신들이 모여 회의가 이루어졌고 결국 외교권을 넘겨준 비운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조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전임 의정대신 조병세, 시종무관장 민영환 등 전현직 관료들은 물론 지방의 유생, 군인 등 다양한 인물들이 자결로써 항의의 뜻을 표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구국을 외쳤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은 소식을 듣고 공사관의 등급을 영사관으로 낮추거나 아예 외교관을 철수시키는 등 대한제국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러일전쟁 직전부터 토지, 외교, 내정, 군대, 사법권까지 차례차례 순순히 내어준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나라의 이름까지 내어준 채 그렇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글 l 오현웅(일반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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