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성, 한국철학과 81학번 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 관리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 현재의 일을 선택하게 된 계기와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처음 법학과에 진학하였다가 곧 내가 갈 길이 아님을 알고 진로를 바꾸어 한국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다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성훈(聖訓)이 있듯이 학문과 교육은 내 즐거움의 전부입니다.

■ 선배님의 대학시절을 회상하면서 지금 후배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1980년대 초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나는 늘 ‘입지(立志)’ 두 글자를 마음 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뜻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 일을 꼭 이루어내고야 만다”는 옛 선현의 말씀은 ‘빠르고 정확한 것’을 선호하는 인터넷 세대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고 봅니다. 참을성과 끈기 있는 사람만이 큰 일을 해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조선한문학사』김태준 지음, 시인사
1930년을 기점으로 약 10여 년간 국문학자·문학사갇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떨쳤던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金台俊)은 학계의 혹성적(惑星的) 존재였다. 그의 {조선한문학사}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한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의 폭을 넓혀가던 1980년대 초였다. ‘전설적 인물’인 천태산인과 해후한 것은 나의 인생 역정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당시, 지난날 좌경적 지식인들의 저술이나 작품에 대한 해금이 단행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일부 비장(秘藏)돼 있던 책을 어렵게 빌려 복사본을 돌려가며 보았었다. 저술을 통해 본 천태산인은 20대부터 학구적 정열에 불탔던 학자요 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학문을 대성하지 못한 채 희생되었던 분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학문적 업적마저 매몰되는 상황 하에서는 비애감이 더하였다.
천태산인은 일제 때부터 좌파적 지식인으로, 광복 뒤에는 남로당의 거물급 인사로 활약하다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학자이다. 그는 체포될 당시 {고려문학사} 초고를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사형선고 전 최후진술에서 “상아탑에서 고전만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긴박한 생활 속에서도 학구적 정열이 식지 않았으며, 국학에 대한 연구 의지가 넘쳤던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시운(時運)은 이로부터 50여 년 동안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 석 자마저 잊혀지기를 강요하였다.
천태산인은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부터 국고정리를 자임하였다. 여기에 ‘조선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움직여 약관 26세 때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했으며 이듬해에는 {조선한문학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 두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한국문학사 연구에 있어 이정표 구실을 하는 고전적 위치에 있다. 젊은 학도의 기백이 넘치는 두 저술은 나에게 진한 감동과 큰 충격을 줬다. 사실 나 역시 성대 유학대학에 들어간 이후, 완정된 ‘한국유학사’를 정통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대 출신인 내가 저술하겠노라고 굳게 마음먹었던 터였기에 천태산인의 위 저술들은 나의 마음을 고동치게 했다. 거기에 ‘오류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어느 사상가의 말은 더욱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천태산인은 비록 전공은 달랐지만, 나에게 ‘한국유학사’를 저술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무언의 힘을 주신 분이다. 그 분의 저술을 처음 접한 뒤 십 수년이 지나 마침내 5권으로 된 {한국유학사상사}를 완간하여 세상에 물을 수 있었던 것도, 천태산인이 입언(立言)으로써 끼친 영향 덕분이다. 어디 그 뿐이랴. 오늘 내가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지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