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재욱 편집장 (wodnr1725@skkuw.com)


이맘때쯤이면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는 연말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구세군 자선냄비로 모금을 실천하는 이들, 주변 지인들과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얼굴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부모 사기 혐의가 불거진 연예계 보도에서만큼은 연말의 훈훈함은 실종됐다. 한 래퍼는 연예계 퇴출이 기정사실화되고 또 다른 가수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언급해야 했다.

연예인마다 대응 방식과 여론의 태도는 달랐으나 이들 가족을 상대로 폭로가 봇물 터지듯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채무를 청산하고자 하는 ‘을’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과거 채무를 불이행했다는 사실과 그 자식이 대중의 인기를 얻어 현재 가족이 호의호식한다는 사실만으로 을의 억울함은 쉽게 동의를 얻는다. “남의 돈으로 호가호위 하니 기쁘냐” “가족이 모두 사기집단” 등의 여론에 편승하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자식과 부모로 규정된 한 가족은 하나의 ‘적폐’나 다름없이 분류된다. 이전까지는 부당한 권력기관이나 기득권을 대상으로 한정됐던 적폐 청산이 지극히 사적인 관계에서도 수행된 것이다. 

자식이 법적으로 변제할 의무가 없는데 채무를 갚으라는 논리는 전적으로 도의적인 측면에 기댄다. 분명 한 평론가는 “연예인이란 특수한 직을 수행함에 있어 대중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도의적 책임을 져야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인이라는 이미지를 담보로 밝혀지지 않은 가족의 채무를 떠맡는 것이 마땅한 책임의 영역인가? 자식이 공인이라고 해서 언론을 경유한 개인과 개인의 폭로전에 대리자로 소환되는 처사는 불합리하다. 심지어 같은 공인이라고 해도 유독 연예인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우리 사회에 있다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현대판 연좌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부모가 빚이 있다고 자식을 협박하며 돈을 받아내는 사채업자”의 논지와 “자식이 부모의 죄를 책임져야한다는 소리”가 다를 바 없다.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부를 획득한 것이니 언제든 그를 심판대에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더욱이 본인 자체의 결함이 아닌 타인의 그것을 이유로 비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부모의 결함을 책임지는 자식을 훌륭하다고 추켜세우면 그만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사실상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라 뫼르소가 말한 대로 법정 안의 사람들은 그를 재단한다. 하지만 ‘엄마가 죽은 뒤 내가 냉담했다는 것’, ‘엄마의 나이를 몰랐다는 것’ ‘영화 구경, 페르낭델, 그리고 끝으로 마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치밀한 살인자로 그를 변장시켜 사형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여전히 가족과 상식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고 있지만 그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왈가왈부를 곰곰이 생각하면 이는 전형적인 ‘갑질’에 해당한다. 현실에서 갑질을 겪고 이를 되갚을 수 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적절한 분풀이 대상이 아닌가. 때로는 대한민국의 연예인이 조선의 광대처럼 미천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장구한 세월 동안 피해를 겪은 이들의 아픔을 모른 척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저 자신과 무관한 일에 핏대를 올리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누군가를 위해 하는 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적폐다”라는 대학동기의 말은 질타를 받는 연예인보다 질타하는 누군가에게 더 잘 어울린다.     
 

정재욱 편집장
wodnr1725@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