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한국 사회를 가만히 지켜보면 '쏠림병'이라는 것이 있다. 어느 날 와인이 알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온 사회가 와인 전문가로 넘친 일이 있다. 유럽에 꽤 오래 살면서도 그렇게 빈티지와 와인에 대한 정보를 줄줄이 읊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어제처럼 오늘도 빈 보졸레 누보 병을 카페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쓴 블로거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멋진가? 내게는 이상하게 들렸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우리 동네 슈퍼마켓에서 두 병 묶어 5유로에 파는 보졸레 누보가 그렇게 좋은 와인이었나? 둘째, 매일 와인을 한 병씩 마시다니 알코올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보다. (참고로 그렇게 마셔대면 필름 끊어지고 몸 상한다.) 얼마 전 거리 곳곳에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흐르는 것을 보고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원래 고등학교 일학년까지 꿈이 디스크자키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어의 부정사도 모르고 수학의 루트도 이해를 못 해도 팝의 역사는 줄줄 꿰고 다녔다. 당연히 보헤미안 랩소디는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날 퀸 전문가와 프레디 머큐리 숭배자들이 이렇게 갑자기 늘어나는 것은 확실히 당황스럽다. 대중문화야 그렇다고 치자. 어느 해는 정부부터 기업까지 '스티브 잡스로부터 배우자'는 구호로 가득 찬다. 이렇게 갑자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강조하다 보니 '인문학'이라는 명칭이 마치 독자적인 학문 분야처럼 오해되기 시작하고, 여기에 출판사와 대중강연자들이 달려들어 당신을 인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어떨 때는 심지어 하루저녁에!) 만들어주겠다는,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사실 언어의 연구에서 역사의 연구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며, 고물상에서 주워온 것 같은 고문서에 매달리는 분야부터 음성 현상을 첨단장비로 연구하는 분야까지 다 포함한다. 이러한 방대한 지식을 자신이 알고 있으며, 이를 속성으로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희대의 천재이거나 대개는 '약'을 팔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계도 이러한 '쏠림병'에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종종 한국학계는 해외의 이론적 유행에 유독 민감하다는 비판을 듣는다. 비판적 의식 없이 따라갔다가 유행이 바뀌면 역시 비판 없이 다른 이론으로 옮겨가는 것은 덤이다. 그러다 보니 연구의 외연은 화려해질지 몰라도 쌓이는 것이 별로 없다.

칠십년대 대중가요 가사처럼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유행만 좇으면 자기만의 멋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어느 음식점이 맛이 있다고 하면, 대개 맛집이라는 것이 실망하게 하는 것이 다반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줄을 서서라도 먹으려 기를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한 노력은 결국 시간 낭비, 돈 낭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거기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닌 그런 유행을 파는 '남'이다. 가끔 길에서 모두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옷의 광고카피는 남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강조한다. 웃기지 않은가? '남과 다른 나만의 옷차림을 한 똑같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서로를 길에서 무수히 마주친다는 상황 말이다. 유행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대개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지나친 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일반화할 수는 없어도 그 아래에 낮은 자존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실 그 낮은 자존감이라는 것이 별 근거가 없다.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지만 많은 이들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