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상환 편집장 (lsang602@skkuw.com)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랑케지만, 그는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랑케는 사관은 누구보다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사관에게 ‘자아의 소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만큼 신화적인 요구 사항이 또 있을까. 

역사학자 EH. 카는 랑케의 실증주의 사학을 부정했다. 그에 따르면 그 어떤 인간도 중립적일 수 없으며 중립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이미 주관이 된다. 그는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학자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의 선언은 단순히 역사학을 넘어 인간은 정말 공정하게 세상을 볼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을 던진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공정성 잃은 지상파>라는 시리즈물 기사를 연재했다. 기사에서는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인용했는데 지면이 나오자 <조선일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지점에는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면 곧 민주당 지지 기사로 분류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있었다.

카의 주장처럼, 인간, 집단의 편향성은 역사가 입증한 경험칙이다. 더 이상 그리 특별한 고백이 아니다. 오히려, <뉴스의 시대>를 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언론은 중립을 추구하며 사실을 던지는 것에서 더 나아가 좋은 편향을 추구해야 한다”며 언론의 편향성을 긍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일보>의 기사는 본질적으로 무내용했다.

문학평론가 장정일은 한국일보에 연재하는 <장정일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지식인은 실로 무한개의 자아를 가졌다. 이것이 그들을 사악하게 한다. (…중략) 지난 정권에서는 그저 ‘박근혜는 악’이라고 몰아붙이기만 해도 그럴싸한 칼럼이 되었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는 선악의 이분법적 시각만으로는 칼럼 소재를 찾기도 어렵고, 칼럼의 쓸모를 찾기도 힘들다.”, “현 정권의 ‘안전 운행’과 ‘내로남불’식 정의를 파고들려면 새로운 무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은 모범적인 ‘지식인’ 또는 ‘어용 지식인’보다 ‘사악한 지식인’이 돼야 한다.” 선은 악을 전제로 나타난다. 그래서 선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이다. 장 평론가는 이분법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 지식인의 선이라면, 그 선을 버리는 사악한 지식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문열 작가 역시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성경> 속 뱀은 인간을 유혹한 악으로 표상된다. 하지만, 이문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 선의 기준을 조롱하며 악으로 표상되던 뱀에게서 지혜를 본다. 중요한 것은 선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이제, 지식인을 언론으로 바꿔보자. 자신들의 보도가 선하다고 한다고 믿으며 악을 비난하는 것은 기자의 인격이 고매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는 있으나, 좋은 보도가 될 수는 없다. 좋은 보도는 모범 기사, 어용 기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정의로운 기사가 부족해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언론은 날카롭게 파고들고 악랄하게 사안을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조선일보> 기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대신문>은 12월 8일 지난해 마지막 발간 이후 3개월의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성대신문>은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우리는 사악한 언론을 표방한다. 대안도 없이 정의감에 호소에 선과 악을 나누며, 선을 추구하는 것을 지양할 것이며, 정의감에 취해 약함을 정의로 포장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기사를 읽으며 행여 우리의 인격이 고매하다고 착각할 독자는 없길 바란다.

이상환 편집장lsang602@skkuw.com
이상환 편집장
lsang602@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