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일러스트 l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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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일이다. 어느 날 저녁 어스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와 엄마에게 진지하게 하는 말이 “엄마들은 참 이상해요. 세상에서 자기 아이들을 제일 미워해요” 아들의 이야기인즉슨, 아이들과 밖에서 놀다가 함께 친구 집에 들어갔는데 그 엄마가 그 집 아이만 야단을 치더란다. 우리 집에 들어와도 엄마가 나만 야단을 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 집에 가서 보고 ‘아~하’ 깨닫고 나름 내린 결론이다. 그 아들이 지금 박사과정 말년 차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할까? 그럼 그사이에 뭐가 달라진 걸까? ‘사랑은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느낄 때만 사랑이다’ 멋있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맞는 말일까? 아이들은 어릴 때 부모의 돌봄과 훈육을 대부분 미움과 잔소리로 느낀다. 그럼 그건 부모의 사랑이 아닌가? 결국 나이와 함께 삶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사고의 폭의 문제일 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릴 적 부모의 잔소리가 차츰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리처드 바크의 책 『갈매기의 꿈』에서 ‘더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본다’는 말이 나온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혜자란 더 크게 더 멀리 더 넓게 보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닐까?. ‘젊을 때 고생을 사서도 한다’, 젊은 시절 이런 이야기 들으면 열 받는다. 반세기 전 꼰대들의 잘못된 훈육방식이라고 악을 쓰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고 보니 젊은 시절 고생의 결과물에 오늘 내가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 고생 없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내가 원치 않는 자리에서 헤매고 있었을 거다. 지혜는 나이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나 보다. 물론 나이뿐일까? 원치 아니하는 고난과 아픔으로 쌓인 연륜들이 또한 지혜를 만들기도 한다. 세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가끔 청년들이 조언을 구할 때 그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할 말을 잃곤 하지만, 고난을 해석하는 시각이 많이 달라진 나 자신을 보고 놀란다.

훈육을 영어로 discipline 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disciple 즉 제자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그 discipline을 우리말 성경은 ‘징계’로 번역한다. 즉 제자는 징계와 같은 고통스러운 훈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성경은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다 (히12:8)’. 자녀면 다 부모로부터 징계를 받는다는 거다. 부모의 욕심이건 사랑이란 말로 포장되건 부모는 자녀에 거는 기대가 있어 자녀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훈육을 하지만 자녀는 그것을 징계로 받아들인다. 이게 어쩌면 전능자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오늘 나의 고난이 내일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를 모르기에 오늘의 고난을 징계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이영표 선수의 『생각이 내가 된다』는 책에서 참 재미있는 표현을 보았다. ‘노력이란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에서 오는 통증을 미리 나누어 갖는 것이다. 노력에도 고통이 따르고 원하지 않는 결과에도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노력에서 오는 통증이 원하는 결과를 놓쳤을 때 통증보다 더 견디기 쉽다’. 한 분야에 최고가 된 사람의 자기 고백이다. 대부분 아직 오지 않은 결과에 대한 통증보다 당장 지불해야 하는 노력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삶은 그 자체가 부메랑이다. 내가 하는 행동과 선택에 이미 결과가 내재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의 삶은 내일의 결과를 상당 부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확장하면 오늘 나의 위치와 삶은 어제 한 행동의 결과물이다. 청년들이 삶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고난으로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어쩌면 오늘의 이 고통스러운 훈련과정이 나의 내일에 필수적이기에 오늘 나만이 이를 겪는 거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아모르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아픈 오늘은 내일의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니 오늘의 아픔마저 귀하게 여기고 보듬으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오늘의 아픔이 재해석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될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길을 걷는다는 것을---.

배용수 교수생명과학과
배용수 교수
생명과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