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펜을 잡았을 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의 눈에 보이는 격식 있는 글을 쓴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 와중에 기고를 부탁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적당히 써서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농담에 그는 “어차피 남는 건 네 글이니 적당히 써도 상관없겠지”라고 답했다. 그 말이 맞다. 먼 미래에 다시금 이 글을 읽더라도 나만 떳떳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게 아닐까. 이 글은 누군가에겐 날카롭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글을 읽는 당신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자유가 있을테니. 그저 내가 그러하듯, 당신의 판단이 먼 미래에도 떳떳하길 바란다. 
군인이던 시절, 가장 혼란스러웠던 물음은 '소수자가 아님에도 소수자의 권리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였다. 2년 6개월의 대학 생활을 통해 결론 내린 물음이 다시 떠오른 것은 입대하고 반년이 채 흐르지 못한 16년 겨울. 수도 없이 쏟아지는 소수자 혐오에 온갖 스트레스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던 시기였다.

여전히 내게 큰 생채기로 남아있는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다. 무엇도 바뀌지 않은 세상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국가와 자본이 유가족과 피해 학생들에게 사과를 받아주십사 무릎 꿇는 것 같았다. 지금도 수많은 세월호가 도로, 지하철, 하늘, 여전히 그대로인 바다를 건너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여기, 군대라는 체계에 어쩔 수 없단 말로 숨어 여전히 가해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이 어떻게 페미니즘 운운할 수 있냐고 스스로 물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자연스레 모진 말이 나왔다.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난 페미니스트가 아닐뿐더러 될 수도 없어”

한 친구는 함께 이야기하고 분노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 와, 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냐며 울먹거렸다. 다른 친구는 누군가에겐 그 자체로 생명과 안전이 달린 문제니 만큼, 어느 개인이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난 모든 것에 눈 돌리고 살았던 게 아닐까. 혐오 가득한 댓글들을 화난다며 덮어두고, 집회에서 따가우리만큼 쏟아지던 눈빛을 우리끼리 옳은 말을 하고 있으니 된 거 아니냐며 외면했던 게 아닐까. 내가 알고 있었던 건, 알고 있다는 믿음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난 시간에 대한 의문과 냉소가 마음의 반을 채웠을 무렵, 어떤 글을 접하게 됐다. 밑의 글은 발췌한 일부분이다.

‘한때는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것이 민망했다. …… 당사자 운동이 아닌 인권 운동은 한계가 있으므로 남자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이 여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관심병 정도로 해석될까 싶어 주저한 적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다만 남성 페미니스트가 목소리를 내야 할 곳은 자신에게 환호하는 '여초 집단' 주변이 아니라,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남초 집단' 안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웠다. 나만큼 거대한 남초 집단에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만큼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시기가 남은 삶에 있을까?

말을 시작했다. 주로 설명하고, 가끔 반박하고, 보다 가끔은 언쟁했다. 자만일지 모르지만, 효과는 있었다. 몇 명은 제한적인 부분에서라도 페미니즘에 대한 긍정적인 질문과 동의를 표했다. 그 외 대다수가 어떤 이유에서건, 저 사람 앞에선 그런 얘기 안 하는 게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작고 초라하지만, 고작 개인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변화였다.

제대를 하고 7개월이 흘렀다. 최근 불법 동영상 유출, 불법 약물을 사용한 성폭행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 논란이다. 군대에서 느꼈던 남성문화의 온상을 낱낱이 보이는 사건이다.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 쉽게 나오는 말과 행동에서 그와 비슷한 색채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나의 몸 구석구석에 묻은 혐오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마치 처음으로 변화를 경험한 그 시간, 그 공간처럼 말이다.

최근형(사학 14)
최근형(사회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