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작- 깡통집-꼬꼬랑, 보리주랑, 커피도 함께
소설 가작- 깡통집-꼬꼬랑, 보리주랑, 커피도 함께
  • 성대신문
  • 승인 2002.01.01 00:00
  • 호수 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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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도 너를 바라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 너와 사랑하고 싶어. 널 내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어

니가 좋아, 니가 좋아, 니가 좋아...”
“나도, 나도, 나도....”
아침마다 이렇게 시작하는 하루가 너무 좋아. 아침마다 깨기 힘들어서 늘상 지각을 하던 난 어느 새 알람이 울리기 10분전에 일어나서 네 전화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어. 사랑은 구속이라지만 이런 구속이라면 평생을 받아도 상관없겠어. 어쩌다 네가 잊고 전화를 하지 않은 날이면 난 하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지. 혹시 다른 여자가 너의 잠을 깨워서 잡담을 늘어놓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그 귀여운 어리광을 내가 얼굴도 모르는 뻔뻔한 여자에게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형체도 없는 상대를 만들어내서는 인격 파탄자로 만들어 놓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거야. 넌 이런 내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까? 그렇다면 그렇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늘어져라 자고있진 않겠지만 말이야. 1교시가 끝날 때쯤 전화를 해서는 수화기를 들고서는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는 바보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 “그럼 왜 핸드폰은 자동 응답으로 해 놓는 거냐구!” 학교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면 넌 모기만한 목소리로 ‘잘못했어’를 열 번 넘게 속삭이는 거야. 그럼 난 세지도 않았는데 열 한번이 되는 순간에 “그럼 당장 눈앞에 나타나!” 하고 말해. 그럼 넌 길지도 않은 삐죽이 솟은 머리를 휘날리며 내가 있는 인문관으로 뛰어오지. 난 그럴 때마다 씨에프를 찍는 기분이 들어. ‘천개의 불이 켜지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난다!!’ 그 순간엔 난 고소영이 되는거야. 넌 송승헌이 되는거고!

"코발트빛 남방에 면바지를 입은 네가 앞문으로 들어와서 친구에게 인사를 하면서 웃었는데 언젠가는 나를 위해서 웃게 만들겠다... 다짐했었어."

처음 우리가 만났던 날 기억나? 난 그 하루를 생생히 기억해. 그 날의 날씨, 주변의 분위기, 공기의 냄새까지도... 물론 너는 날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난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었어. 두 달 안에 네가 내 노예가 될 것이라는 걸 말이야. 비록 두  달이란 기간은 틀렸지만 지금에 와서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난 남자를 볼 때 외모는 정말 신경쓰지 않아. 하지만 너의 그 잘생긴 얼굴에 반했다는 걸 부인할 순 없을 것 같아. 자꾸 네 얼굴로 돌아가는 눈을 제자리로 불러들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하지만 너의 그 해맑은 미소가 없었다면 널 좋아할 수 있었을까? 코발트빛 남방에 면바지를 입은 네가 앞문으로 들어와서 친구에게 인사를 하면서 웃었는데 언젠가는 나를 위해서 웃게 만들겠다.... 다짐했었어.

일본의 역사... 여교수님의 다소 지루한 수업이었는데 단 한번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왜냐면 그때 내 관심사는 명치시대니 무로마치 막부가 아니라 너의 표정이고 너의 손짓 하나 하나였으니까 말이야. 시범 강의를 듣지 않았던 것도 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강의의 첫 번째 날 지각을 하지 않았다면 난 수강 변경을 했을 테니까. 난 복수 전공으로 일본학을 들어야 했고 넌 사학과라서 그 과목을 수강했었지. 하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거, 너도 알고 있지?

난 이름도 모르는, 난생 처음 보는 네게 끌리는 데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내게는 다시없을 운명같은 끌림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작업에 들어갔어.  내가 한 자존심 하는 거 알지? 그래서 처음엔 네쪽에서 먼저 관심을 가져주길 간절히 기도했었지. 그리고는 기도가 효과가 없자 친구들이 가르쳐준 작업 단계를 찬찬히 밟기 시작했어.

우선은 반지가 있나 살펴본다. 일부 양심없는 남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반지를 끼고 있기 마련이라고 하더군. 다행히 반지는 보이지 않았지... 휴∼

다음 단계는 군대에 갔다 왔나 확인하기. 20대 중반에 들어서는데 통일이 되기를 기도하며 살 수는 없잖아? 예비군 훈련이 있었던 날 개구리 군복을 입고 온 네가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이던지...! 
그 날 집에 가서 고개를 머리카락 투성이인 방바닥에 붙인 채 기도했어.
“하나님, 그가 절 사랑하게 해 주세요!! 그럼 평생을 착하게 살겠습니다!!”
하고 말이야.

3단계는 각인 단계야. 상대의 눈을 3초간 바라보는 건데 이건 정말 어렵더라. 3초가 뭐야 1초도 바라보고 있기가 힘이 들었어.(1초도 4초도 아닌 3초여야지 상대가 나를 확실하게 기억한대) 콩나물 시루인 교실에서 너의 근처에 앉기도 힘들었고 널 관찰하려면 너의 뒤쪽에 자리를 잡아야 했거든. 뒤에 앉아서 눈을 마주치려면 네가 뒤를 바라보게 해야 하는거잖아. 네 옷에 물을 쏟아볼까 숙제를 물어볼까 고민했지만 그 교수님 어쩌면 숙제는 내주지도 않으시지 뭐야!  

각인 작업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기 시작했고 그렇게 바라만 보기에 지친 난 널 얼굴만 잘생긴 빛 좋은 개살구라고 결론짓고는 마음을 접기로 마음먹었지. 네가 웃을 때면 저건 카사노바의 웃음이다... 어쩌다 결석을 하면 성실은 기본인데 그것도 안 된 놈이니 잘 단념했다...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지.

하지만 네 이름을 안 날, 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시 널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했어. 학교 축제로 학교가 어수선했고 휴강이어서 매일 너의 뒤통수만 보다가 난 거의 처음으로 오랫동안 너의 앞모습을 보게 되었고 너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앞뒤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어. 네 이름은 우연처럼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내 어릴 적 친구의 이름과 일치했고 너의 이름이 흔하다는 것은 신경쓰지도 않고 '포기하지 말라... 그의 이름을 알려주나니 다시 한번 애써보거라...'하는 신의 계시라고 나 좋을 대로 짜맞췄지. 출석표를 내는 수업이라 너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거든.

학교의 축제와 수업이 겹친 날 넌 빨간색 웃옷을 입고 있었어. 시야에서 널 놓친 다음 학교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태연한 척 여기저기 둘러보는 척 했지만 사실은 너를 찾는 중이었어.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빨간색 옷이 많은 거지? 축제의 도우미들이 온통 빨간색으로 통일을 한 거야!

캠퍼스에서 찾기가 실패하자 난 다음카페에서 네가 가입했을만한 카페를 뒤지기 시작했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네 이름을 발견하고는 피시실에서 옆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예스!'하고 소리를 질렀지.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도 고작 몇 가지 안되지만 말이야. 네가 나와 동갑이라는 것과 네가 사학과라는 것, 네 취미가 당구와 음악감상이라는 것 정도... 

그 다음엔 학교의 전자 수업 시간표로 들어가서는 사학과의 수업 시간을 알아냈어. 그리고는 뭐...나라고 별수 있었겠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그 교실 앞에 나가 있었지. 자주 보면 정드는 법이라고 너도 모르게 자주 눈에 띄는 내가 궁금해 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결국 넌 내가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어. 난 너에게 알 수 없는 시선을 자꾸 보내서 네가 날 의식하게 만들었어. 하지만 중요한 건 절대 그 시선이 끈적하거나 애절해서는 안된다는거야.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알 수 없는 냄새를 풍겨야 한다구. 난 항상 널 한 3초간 바라보다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날리곤 했어. 나중에 넌 웃으며 참 알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했지만 그 각인 작업이 먹혀 들어간 것은 사실이잖아? 어쨌든 수업이 끝나는 날 넌 내 짐작대로 내게 말을 걸었어.
“시험 잘 봤어요?”라고 말이야.

물론 난 그 날 시험을 죽쒔어. 너하고 말하려고 아니 네게 말시킬 기회를 주려고 일찍 답안지 칸을 채우고 오지도 않은 핸드폰 메세지를 확인하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기억나? 비오던 날 마로니에 공원에서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발발떨며 자판기 커피 마시던 것 말이야. 넌 자판기 커피밖에 못 사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거 알아? 커피숍에서 마신 수많은 커피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공원에서 마신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다는 거 말야... 그날의 밤 공기, 조그만 우산을 받쳐준 너의 듬직한 손, 내가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너의 어깨가 흠뻑 젖게 했던 거, 부슬비 속에 번져가던 커피 연기와 향, 너의 멋쩍은 표정, 어두워서 잘 안보였지만 분명히 붉게 물들었던 너의 귓불까지 말이야...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와 신문지 방석을 호텔의 고급커피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방석과 바꾸라고 한다면 내가 바꿀 것 같아?

넌 림프 비즈킷과 라디오 헤드를 참 좋아했어. 조용하고 따라하기 쉬운 노래를 즐겨듣던 내게 림프 비즈킷의 음악은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나도 울적한 날 그의 노래를 들어. 바위가 깨지는 듯한 음악에서 힘을 얻고 다시 일상으로 용감하게 뛰어드는 거야.   

라디오헤드의  ‘thinking about you...’
난 네가 이 노래를 내 귓가에서 불러주는 걸 좋아했어.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은 나만을 생각하겠지.. 가사가 가사인만큼 말이야.

우리가 크게 싸웠던 건 담배문제를 제외하곤 없었던 것 같아. 난 네게 이별까지 들먹이면서 담배를 끊을 것을 제안했고 넌 기호품이고 흡연자의 권리 어쩌구하며 저항했었지. 우리집에 데려다 줄 때면 약수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우린 늘상 일부러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어. 금호역에서 내려서 터널을 걸어오는 길이 좋아서 말이야. 12시가 다 된 시간에 소리를 질러야만 대화가 가능한 그곳에서 우린 무드없게도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뭐야. 난 차가 쌩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 다섯달 안에 담배를 끊지 않으면 너와 헤어지겠다고 했어. 그리고 ‘담배 한 개비에 키스 일주일간 안 하기’를 조건으로 내걸었지. 결국엔 내가 먼저 기간을 3일로 줄이자고 했지만 말이야. 물론 1년이 지난 지금 넌 여전히 담배에게 지배당하고 있고 난 여전히 너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

금호역에서 장충 공원쪽으로 터널을 따라 내려오면 마법의 집을 지나는 관문처럼 '깡통집'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술집이 있어. 테이블이 두 개나 놓여 있었던가? 깡통집이라는 술집 이름도 재미있었지만 그 밑에 작게 쓰여진 ‘꼬꼬랑, 보리주랑, 커피도 함께’라는 말이 재미있었고 달관한듯한 점쟁이같은 분위기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주인 여자가 재미있어서 우리 둘의 단골집으로 삼기로 결정했어. 우리에게 ‘짚시 여인’으로 통하던 그 술집 여주인은 항상 핑크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어. 그것도 어디서 저렇게 촌스러운 핑크색을 골라올까 싶은 색깔로만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자에게서는 오히려 세련된 분위기가 풍기는 거야. 어쨌든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것만 같은 여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면서 그 작은 술집 안에서 다른 사람이 모두 듣게끔 큰 소리로 싸움을 하고 나면 어느새 그 집을 나설 때면 내 손은 너의 손을 깍지껴서 잡고 있지 않겠어?
깡통집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인가봐. 어떤 연인이건 이곳에 오면 화해를 하고 돌아간다는...

"사업빚에 시달리는 엄마가 당신의 딸이 빠져서 정신 못차리는 남자는 얼굴만 톰크루즈같고 취업이 잘되는 경영학과도 아닌, 당구와 림프 비즈킷에 열광하고, 낭만적이기만한 남자라는 걸 알면 뭐라고 하실까"

넌 왜 그리 남자다운건지. 난 때론 그게 불만이야. 널 찾으려면 학교 앞의 당구장을 헤매고 다녀야 하지. 당구장을 온통 뒤져 겨우 널 찾으면 넌 내가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당구에 열중하고 있어. 송송 솟아난 이마의 땀이 식을 때까지 넌 날 알아보지 못해. 내가 찿아왔다는 것보다 반들거리는 당구알이 구멍에 들어갈 때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걸까?

왜 오토바이는 타고 돌아다니는 거지? 네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친 날, 난 몰래 오토바이의 뒷바퀴에 구멍을 낼까 심각하게 생각했었어. 빨간 약을 온통 쳐바르고 청춘의 심벌이라는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돌아다니는 남자 친구의 아슬아슬한 모습이라니!

술과 담배는 왜 끊을 수 없는 거지? 밤에 도서관에서 나오는 나를 거나한 얼굴로 맞이한 네가 토해내는 사랑 고백이 싫진 않지만 그럴 때면 엄마의 얼굴이 스쳐지나가.

“딴 거 필요없고 남자는 돈 잘 벌고 너 끔찍이 위해주면 되는거야. 술.담배는 안 할수록 좋고 경영학과같은 취업 잘되는 학과면 좋겠고 더도 덜도 말고 엄마한테 딱 1억만 주고 너 데려갈 남자하고 결혼해라. 남자가 얼굴 잘 생기면 속만 썩이니까 딱 뚝배기같이 생긴 남자가 진국인거야.”

사업 빚에 시달리는 엄마가 가끔 농담 반으로 하시는 말씀이지만 당신의 딸이 빠져서 정신 못차리는 남자는 얼굴만 탐크루즈같고 취업이 잘되는 경영학과도 아닌, 취업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당구와 림프 비즈킷에 열광하고, 낭만적이기만한 남자라는 걸 알면 뭐라고 하실까.

어느 날은 엄마에게 “엄마 딸이 겨우 1억짜리로 보여? 적어도 10억은 되야지이!!”하고는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는, 슬리퍼를 끌고 놀이터로 나와서 바보처럼 울고는 그네를 타면서 바람에 눈물을 말렸지.

하지만 난,
출세하겠다고 하루종일 도서관에 쳐 박혀서 무슨 무슨 시험만 합격하면 쭉쭉빵빵한 미인들이 줄을 설 것이다라는 망상을 하고 있는 남자들에겐 도무지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걸 어쩌겠어.
하지만! 조금은 긴장해 줄 수 없어? 난 결혼 적령기를 얼마 안 남겨놓은 주변의 잔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피곤한 신분이라구. 친구들은 내게 충고해. 결혼은 현실이라고. 사랑? 그거 뇌의 화학작용일 뿐이래. 3년만 지나면 내 살이 그 살같고 그의 살이 내 살 같아지는 거래. 한술 더 떠서 불끄면 남자 다 똑같다나?

너하고 ‘결혼은 미친 짓이야’를 보고 나오면서 난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어. 여자들은 사랑이 결여된 결혼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거야. 초등학교 3학년만 되어도 적당히 갖고 있다는 게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가장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라는 걸 자연히 온몸으로 배우게 되니까 말이야.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10만원짜리 유기농 맘마밀 4단계를 포기하고 죽을 쑤어 먹이는 것일까? 하기스 골드 기저귀를 아기에게 입히지 못하고 매번 똥 묻은 기저귀를 빨아야 하는 것? 인형같은 아기 모델이 선전하는 브랜드 제품을 나의 아기에게 입히지 못해서 속상해 하는 것? 남자 친구가 사준 것이라면서 30만원이 호가하는 고급 핀을 자랑하는 친구 앞에서 네가 큰 맘 먹고 사준 칠천원짜리 이미테이션 보석이 달린 핀을 달고 있는 것? 남자친구의 고급스런 차에 타고 의기양양하게 사라지는 후배를 보낸 후, 너의 중고 프라이드를 타고 뒤따라가는 것? 미용실에서 케라스타즈, 콤푸렉스, 옵티마이저에 앰플 마사지, 코팅까지 한 자리에서 받는 친구를 따라가서 머리는 자연 상태로 두는 것이 가장 좋은 거라고 애써 웃으며 말하는 것? 졸업 앨범을 찍을 때 수십 만원짜리 메이크업을 받을 수 없는 것? 명품 모조 백을 사러 동대문 시장에 가서는 '감쪽같은 것' 없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

넌 당구에 정신이 팔려서 내게 연락하는 걸 잊을 때가 부지기수면서 내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지. 특히나 내 핸드폰에 정체불명의 남자의 이름과 번호가 찍혀 있을 때면 넌 거의 정신을 못 차리지. 평소에 지극히 이성적인 네가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일 때면 난 왠지 재미있어서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신용 불량자인 부모님이 내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내 이름으로 일수를 찍고 카드를 발급 받아서 그들의 전화를 묵묵히 받아 주어야 한다는 걸 너는 알 리가 없으니까 널 원망할 수도 없다구. 네가 질투를 하는 대상이 일수쟁이와 카드사 직원이라는 걸 넌 상상이나 할까?

첫키스 한 날, 기억해? 둘 다 처음 하는 사람처럼 비맞은 개마냥 벌벌 떨었어. 입 근육이 떨려서 난 그만 실수로 너의 혀를 깨물어 버렸는데 넌 아프지 않은 척 웃느라 고생했었지. 키스를 하면서 네가 은근 슬쩍 내 가슴을 스친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둘 다 양치질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달콤해야 할 첫 키스가 치약을 핥아먹는 기분이었어. 넌 죽염 치약이었고 난 1318치약! 두 치약이 합쳐진 맛이란!!

난 너의 얼굴에 선 블록 크림을 발라주는 걸 좋아했어. 운동을 즐기는 네 얼굴에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크림을 발라주는 것은 정말 즐거워. 그 순간만큼은 넌 어린 아이처럼 내게 네 얼굴을 맡기는 거야. 아기처럼 눈을 감고 내 앞에 서면 난 적당량의 크림을 손에 덜어 네 얼굴의 구석구석에 곱게 펴 발라. 하지만 항상 몰래 덩어리를 만들어서 코의 중앙에 점을 찍어놓은 것도 모른 채 넌 농구대로 뛰어 들어가는거야. 친구들의 웃음 소리에 비로소 이유를 깨달은 네가 날 찾을 때쯤이면 난 자취를 감추고 수선관 2층에 숨어서 너의 화내는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지.    

네가 내 발톱에 메니큐어를 발라 주는 것도 난 좋아해. 그 순간만은 넌 내 노예가 되는거야. 내 발에만 집중을 하는 거지. 살갗에 메니큐어가 번지면 손으로 발가락 사이를 문질러가며 조심스럽게 바르는 네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제 했던 날 옥죄는 세상에 대한 걱정이 한 순간에 상쾌한 냄새가 되어 사라져버려...

신라호텔을 마주보고 장충 공원을 따라 걷다가 유관순 상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성곽길로 통하는 문이 나와.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비밀스러운 길... 그 길을 우리는 마치 고양이 부부처럼 은밀한 걸음으로 걸었어. 오르막길을 뒷걸음으로 걸으면 힘들지 않다는 것도 그때 알았지. 그곳에서 넌 날 갈비뼈가 으스러져라 세게 안아주었어. 기억나? 그때 우린 하나의 이어폰을 나누어서 듣고 있었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이 미스터 칠드런의 ‘다키시메타이(안고 싶어)’라는 것을 넌 알았던 걸까? 넌 일본어를 몰랐는데 말이야. 난 니가 그렇게 안아 주는 걸 좋아해서 자주 그 길로 가자고 졸랐었지. 네가 그렇게 안아줄 때면 난 네가 정말 남자처럼 느껴졌어. 근육이 불룩한 팔의 감촉에 황홀했고 팔짱을 낄 때 너의 팔이 내 가슴에 살짝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어. 성곽길을 나와서 여자의 가발같이 생긴, 담쟁이 덩굴로 덮힌 성곽길의 문을 통과하면 조선을 세운 태조가 쌓아 올렸다는 서울 성곽길이 나와. 그때부터 우린 은밀한 걸음의 고양이 부부에서 점잖은 조선 시대의 양반 댁 자제가 되는 거야. 넌 심각한 얼굴로,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 성곽이 해방과 한국 전쟁 혼란기 등 많은 희생을 치르며 쌓은 성곽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을 화나게 하면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어.

내가 과외를 하는 곳은 버티고개역 3번 출구에 있는 남산타운 아파트야. 하루는 지하철역에 내려서 3번 출구로 나가는 문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립스틱을 덧바르고는 휴지를 뽑으려는데 이건 휴지 자판기도, 생리대 자판기도 아닌 콘돔 자판기가 아니겠어? 어라!? 우리나라 많이 변했네...하며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내가 이 나이되도록 콘돔이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난 콘돔이 되게 비싼 줄 알고 있었는데 겨우 500원이지 않겠어? 근데 왜 그 많은 연인은 500원이 아까워서 피임을 하지 않고는 사고를 치는 걸까? 일반형은 500원, 고급형은 1000원. 사용할 것도 아니고 해서 일반형을 뽑아서 뜯어봤는데 난 만져보고는 깜짝 놀랬어. 웬 돼지 기름같은 것이 손에 묻어나는거야! 꼭 곱창을 만진 느낌에 찝찝해서는 가방 앞주머니에 쑤셔넣고 과외를 하러갔지.

과외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너와 함께 금호역까지 버스를 타고 갔어. 우리가 좋아하는 금호 터널 길을 걸으려고 말이야. 금호터널을 빠져 나오면 중구 청소년 수련관이 보여. 우린 거기서 사람들이 런닝머신 위를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건너편의 깡통집에 들어갔어. 깡통집이 깡통집인 이유는 천장과 벽에 온통 깡통을 달아놨기 때문이야. 깡통을 달아서 기차길을 표현한 줄 알았는데 666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있었지 뭐야? 그걸 알았을 때 왠지 섬뜩하다는 생각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불행을 당당히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깡통집 앞에는 고개 없는 통닭이 누런 담요 빛을 내며 구워져 돌아가고, 우린 얼마 전 발명된 털없는 닭 이야기를 하며 깡통집 안으로 들어갔지. ‘털 없는 닭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할까. 난 민망해서 닭계장을 운영하지 못할 것 같아...’ 그 날은 우리가 만난 지 200일이 되는 날이었어. 난 그 동안 몰랐던 너의 아픔들을 알게 되었고 나도 일부는 털어놓을 수 있었어. 너의 아픔이란 아버지와의 오랜 갈등 정도였지만 말이야.

이야기를 하다가 내 가방의 앞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져 나왔는데 아까 무심코 쑤셔 넣은 콘돔이었지 뭐야. 널 말리려는 순간 넌 벌써 고개를 숙여서 그걸 집어들었고 자세히 보지도 않고는 그게 무엇인지 알더군. 순간 난 어쩜 그리 빨리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넌 얼굴이 옆에 놓여 있던 이름모를 칵테일처럼 발개지더니 ‘이거...’라고 하더군.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정 얘기를 했지. 아까 버티고개역 화장실에 자판기가 있어서 호기심에 한번 사봤다고 말이야. 너와 나의 술잔 사이에 잠깐동안 어색한 공기가 감돌다가 네가 먼저 나가서 좀 걷자고 했어.

깡통집을 나와서 합동 공인 중개사를 지나면 돌아서 동광 수퍼가 있어. 동광 수퍼 바로 옆에는 동광 목욕탕이 있는데 그곳은 여관과 목욕탕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야. 넌 목욕을 하러 가자고 했어. 어이가 없어서 난 그냥 무시하고 웃고 말았지. 그리고 난 당황해서는 할말을 찾기 위해서 여관 옆에 있는 신당3동 구의원 후보 선거 사무소로 총총히 걸어가서는 그 앞에 걸려져 있는 선거 공약을 소리내서 읽었어. “약수역 5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설치, 교통신호체계. 횡단 보도 조절, 마을 버스 운행, 재래시장 정비로 활성화, 24시간 어린이 놀이방 운영....”

그리고 말했지. (난 아마 그때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아. 그저 무슨 말이라도 지껄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
“어? 에스컬레이터 설치되면 좋겠다. 우리 마을에 마을버스가 안 다녔나? 그러고 보니 못 본 것 같네... 근데...저런 공약 다 지킬까?”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마구 지껄여댔지.

그랬더니 넌 그 옆에 있는 엠케이 클럽 당구장으로 화난 발걸음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야.
누가 화를 내야 하는 건데? 왜 네 발이 화를 내는 거지? 난 황당해서 네가 다시 걸어 나오길 기다렸다가 어쩔 수없이 지하에 있는 당구장으로 걸어 내려갔지. 난 정말 황당했던 거야. 넌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아예 맘을 먹고 콘돔을 사와서 마음을 있는대로 흔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한다고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난 남자와 잠을 자고 싶어서 나의 상처들을 까발린 것은 아니라구!!

난 정말 화가 났었어. 그래도 일단 설명을 하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서 내려가서는 널 찾았어. 끊기로 약속한 담배를 입에 물고는 별의 별 폼을 다 잡으며 당구를 치고 있는 널 보며 순간 난 억울했어. 난 이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혼자 안고 있었던 내 이야기를 일부 털어놨는데 넌 어떻게 하면 나와 잠을 잘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는 거잖아?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는 거라구! 그 다음에야 여자는 그 사람하고 잠을 잘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거야. 적어도 나는 그래.

어쩜 혼자서 그렇게 내기당구를 하는 것처럼 당구를 칠 수 있지? 때마침 당구장에선 캔의 ‘가라가라’가 흘러나오는데 ‘니가 없어도 돼 세상에 반은 모두 여자야’하는 구절에서 넌 나를 힐끗 쳐다본 것만 같았어. 

"그래도 그와 있고 싶어! 평생 먹여살려야 한다고 해도 그와 사랑하고 싶다구!!"
내 자존심을 더 이상 상하게 하면 나중에 너의 얼굴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냥 널 두고 나와버렸어. 그렇게 헤어진 이후 특별히 갈 데가 없어서 다시 깡통집으로 축 쳐진 다리를 겨우 안아 들다시피해서 끌고 들어갔는데, 짚시 여인은 내게 공짜 커피를 한 잔 내주며 이렇게 말했어.

“아가씨하고 그 남학생하고는 정말 잘 어울려.. 하지만 그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자네가 돈  문제를 짊어지고 살아야 해. 남자를 먹여 살려야 한다구... 얼굴도 반반한데 영리한 결혼을 하라구!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그 여자를 이유없이 신뢰하고 있던 나로서는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지만 더 무슨 불리한 말이 나올까 두려워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에 대고 말했지.
“그래도 그와 있고 싶어! 평생 먹여 살려야 한다고 해도 그와 사랑하고 싶다구!!”
그건 단지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을까? 그때 난 이미 세상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는데, 더 이상 엄마가 고생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는 세상과 타협해서 지금 내게 없는 것을 얻어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우습게도 그 순간에 그런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난 나름대로 심각하게 생각했어. 그 다음날 학교에서 죽은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학교를 뚱뚱한 비둘기의 느린 걸음으로 걸어다니면서 생각을 했어. 퇴계 인문관에서 중앙도서관의 돌다방에 앉았다가 600주년 기념관의 건물 뒤쪽에 스파이더 맨처럼 붙어있다가 나중엔 명륜당까지 숨어들었어. 그때 내 머리속에서 맴돌던 생각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적인 사람이 되는거야. 아예 전문 과외교사로 나서볼까? 지금까지는 없는 나만의 경쟁력을 키우는 거야. 다이어트도 열심히 하고 아나운서같은 말씨를 배워서 중고생들에게 ‘천사같은 과외 선생님’으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거지. 한치의 헛점도 보여선 안돼. 예쁘기만한 과외교사가 아니라 실력도 울트라 캡숑이어야 해. 감각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공부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 유머 사이트에 들어가서 최신 유머를 수집해야지. 아이들이 수업 시간을 지루하게 느끼면 안되니까. 시간은 단 일분이라도 늦으면 안되고 어머니들께는 능력있고 신중한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해. 수다쟁이 아줌마의 눈에 들면 인기 과외 교사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구! 그러면... 난 엄마를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 내 줄 수가 있고 그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

돈 잘 벌어오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길이라고 남들은 말하겠지만 얼굴만 봐도 콜라로는 모라라서 냉녹차까지 마셔서 속을 가라앉혀야 하는 사람과 사는 것보다 전자가 훨씬 나을 거라구...”

숙제를 하기 위해 사물함까지 기듯이 올라와서는 녹이 슬어서 잘 열리지 않는 사물함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었는데 난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말았어. 장미꽃 한 다발과 작고 예쁜 푸른색의 모래시계가 들어 있었으니까.
“미안해, 모래시계처럼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될게.”라는 말이 적힌 카드와 함께.

넌 내가 과외를 많이 하는 것이 불만이었지. 학생이 왜 그리 돈 욕심이 많냐고 했지. 난 속으로 나도 안 할 수 있으면 안하고 싶다고 외쳤지만  집안 사정을 시시콜콜히 말하느니 돈만 아는 속물이 되는 게 나아. 게다가 넌 돈을 버는 것엔 별 관심이 없쟎아? 그러니 나라도 벌어야지.. 난 너와 계속 함께 있고 싶어. 그렇다구 궁상을 떨면서 살고 싶진 않다고.

넌 내가 과외를 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상업적이라고 했어. 과외를 하러 갈 때 아이들에게 들려줄 야한 농담을 준비하는 내가 우습다고 했고 아이의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블라우스의 맨 윗 단추를 잠그는 것도 걸고 넘어졌어.

넌 내가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인 친구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못마땅해했지. 특히 외국인 남학생하고 말을 하고 있기만 해도 양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거야. 남의 비위 맞추고 상냥하게 말하는 게 싫다면서 어쩜 그렇게 돌변해서 애교가 흐르는 여인이 되느냐고 했지. 그래,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건 별 이유없이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하는거야. 하지만 난 할거야. 네가 알아? 부모가 사채업자에게 멱살 잡히는 드라마같은 장면을  봐야하는 자식의 심정을? 그리고는 돌아서서 내가 방금 본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일일 연속극이야라고 여러번 최면을 걸어야 다음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쓰지도 않은 카드 빚 독촉에 시달려야 하는 나의 일상을 아느냐구? 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객님, 믿는 은행 저축에서 알려 드립니다. 이달 이자 연체, 채권팀 법적 절차 착수할 예정’과 같은 문자를 오자마자 부리나케 지워야 되는 내 심정을 알아? 내 음성사서함에 ‘이봐요!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지! 학교에 가서 망신을 주는 수가 있어!’와같은 낯선 남자의 음성이 정기적으로 녹음되는 걸 아느냐구...

내가 과외를 하지 않으면 너하고 연애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느냐구! 넌 비싼 귀걸이를 많이 한다고 퉁퉁거렸지만 잠을 못자고 새벽시장을 다리품을 팔아서 겨우 건져낸 이천원짜리 이미테이션이라는 걸 알 리가 없겠지?

모르겠지. 영원히 모를거야. 내가 말 안 할거니까.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고는 내가 과외가 끝나는 시간에 기다리고 서 있다가 내가 좋아하는 군밤을 들이밀면 난 나도 모르게 입이 귀에 가서 걸려버리고 마는거야. 입꼬리가 올라가는걸 조절하느라 입을 오므리면 웃는 것도 무표정한 것도 아닌 어색한 웃음이 되어버려. 그럼 또 과외를 하는 내내 했던 ‘도도한 여자가 되자’라는 결심을 무너뜨리고 네게 안아달라고, 입 맞춰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깍지 낀 손을 놓지 못하다가 네가 등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일수쟁이의 전화를 받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중얼거리고 있어.

미스터 칠드런의 ‘도모다치또 코히또 우소또 이부쿠로’(친구와 커피와 거짓말과 위)를 들으면서 다투었어. 노래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말이야. 난 물이 물 주전자에서 컵으로 떨어지는 소리라고 했고 넌 사내아이가 오줌을 싸는 소리라고 우겼어. 어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 결국엔 말다툼으로 번지는 걸까. 난 이 노래의 제목이 ‘친구와 커피와 거짓말과 위’라는 뜻이니까 커피잔에 물 따르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고 했고 넌 사내아이의 오줌누는 소리를 녹음해놓고 들려준 거라고 했지. 난 별것도 아닌 걸로 우긴다고 했고. 넌 오늘 내가 오자마자 지워버린 문자 메시지 이야기를 꺼내며 내가 너를 의심이 많고 우기기 잘하는 남자로 만들고 있다고 했어. 이럴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난 임기응변에 강한 편이고 대체로 여유가 있는 편인데 그땐 말까지 더듬어서 네게 의심만 더 강하게 들게 해주었어.

넌 내가 독립적이고 의존적이지 않다고 좋아했어. 데이트 비용을 동일하게 부담하려고 하는 것에 처음엔 미안해했지만.
하지만, 그게 다 내 전략이라는 것은 모르지? 난 나중에 네 옆에 있지 못할 때도 네게 동일한 파트너였던 걸로 기억되고 싶은 거야. 용돈만 축내고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추억속의 양심없던 그녀가 아니라.  

널 만난 이후로 좋은 게 있다면 자연스럽게 체중이 줄었다는 거야.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널 만난 이후로는 간식을 별로 찾지 않게 되었던 것이 원인이었어. 너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넌 아무 반응이 없다가 잠시 후에 약간 심각한 얼굴로, 그럼 네게 난 간식 같은 존재구나? 라고 했어. 그때 네 표정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느라고 고생했는데 넌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랫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지.
그래, 넌 내게 간식같은 존재일지도 몰라. 출출할 때 주린 배를 채워주는 간식같은 사람...  

우리가 만약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면 난 네가 이 모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평생 나와의 기억에서 자유로우면 안돼. 불치병으로 죽으면서 애인에게 나를 잊고 다른 사람 만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는 여자들... 그런 거 다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야! 넌 날 영원히 기억해야 해. 나와의 기억으로 1년의 하루는 가슴 아파하며 술잔을 기울여야 되고, 평생 네 마음만은 나의 노예가 되어 주어야 한다구. 못된 여자라고 생각해도 좋아. 우리가 처음으로 키스했던 날 고양이가 사사삭 소리를 내며 지나갔었다는 것과 그날의 공기가 달콤 쌉싸름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고, 우리의 첫키스의 맛은 두가지 치약맛이었다는 것도 잊으면 안 돼. 미스터 칠드런의 ‘다키시메타이’를 들을 때는 나를 품에 안을 때의 감촉을 떠올려야 하고, 커피 잔에 물을 따를 때도, 사내 아이가 오줌누는 광경을 볼 때도 날 떠올려야 해. 그리고 네가 날 미치도록 좋아했었다는 것도...
네 기억의 반은 내가 주인이야. 내가 지배하는 거라구!
아, 참! 하나 더!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끊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면 안 돼...

“자, 오늘은 그만 하죠, 출석표 제출하세요...”

난 오늘도 너를 바라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 너와 사랑을 하고 싶어. 널 내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어. 2시 45분... 수업이 끝났으니 다음주 화요일까지 기다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지 뭐. 벌써 다음주면 이 수업이 끝나는데 난 아직 네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했어. 내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언젠가 네 손에 쥐어질까? 내가 미래를 점쳤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그는 오늘도 내가 던지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소설가작 당선소감- 김의경(어문3, 국문)
 글쓰기는 고마운 친구와도 같은 것 
  
버릇없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낼 때의 엄마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슨 비밀스런 일이라도 하듯이 조금씩 끄적거려 조각조각 퍼즐을 맞추듯이 완성한 작품을 나만의 인테넷 카페에 숨겨두었었다. 평생 아무에게도 보여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설들을 이번 문학상에 출품하기까지도 많은 고민이 따랐다. 이번 문학상에 출품한 것도 사실은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저 작은 가능성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며칠 뒤면 학교 신문에 작품이 실려서 다른 사람들이 읽어본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기쁨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이제까지는 내게 무슨 대단한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그저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글쓰기는 내게 더 큰 무게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을 탓하며 다른 길을 모색하려던 내게 이번 수상은 많은 격려가 되었다. 졸작이지만 가작으로 뽑아주신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한편 한편 늘어갈 때마다 더 나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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