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는 상태로 음산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고, 길거리엔 누더기 차림의 아이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뭔가를 달라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그 아이들을 지나쳤다. 아이들을 지나치고 얼마 안 가, 앞니가 시려오기 시작했다. 앞니를 살피려 입에 손을 대자 앞니는 뚝 하고 손바닥에 떨어졌고,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렸다. 가루가 된 앞니는 바람이 불자 공기 중에 흩날렸고,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홀린 듯 가루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세피아 톤으로 바뀌었고, 주변을 맴돌던 가루는 까맣게 변하더니 흙먼지가 되어 온 공기를 뒤덮기 시작했다.

거리는 어느새 참혹한 전쟁터가 되어있었고, 나는 군복 차림으로 참호 속에 엎드려 있었다. 눈앞으로 전쟁터의 전경이 보였고 ‘필리핀-한국 전쟁’이라고 쓰인 자막이 마치 영화처럼 나타났다. 자막을 본 나는 군복을 살폈는데, 군복엔 필리핀의 국기가 박혀있었다. 국기를 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필리핀인이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던 나는 거리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서둘러 앞니를 더듬었고, 앞니 둘 다 멀쩡함을 확인했다. 안심하며 앞니를 만지는데, 갑자기 적진에서 발사된 총알이 내 쪽으로 날아와 그대로 내 앞니에 부딪혔다. 총에 맞은 앞니는 거리에서처럼, 반으로 쪼개져 가루가 돼버렸다. 기묘한 데자뷔를 느끼고 있던 순간, 바람이 불어 옆에 있던 병사의 코로 가루가 들어가 버렸다. 가루를 마신 병사는 마약이라도 한 듯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 순간 나는 그의 입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글자 ‘하하’였다. 웃음소리와 함께 글자 ‘하하’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와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고, 온 전쟁터가 ‘하하’로 가득 차더니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병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전쟁터는 버려진 창고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창고 중앙에 왕좌처럼 놓여 있는 의자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내 옆으로 해골이 잔뜩 쌓여있었고, 방독면을 쓴 사내들이 해골을 사포로 갈아 그 가루를 봉지에 담고 있었다. 그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가루가 담긴 봉지를 사 가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본 순간 나는 전쟁터에서 그랬듯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마약왕이었다. 전쟁터에서 병사의 이상행동을 본 후 해골 가루에 마약 성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나는, 전쟁이 끝나자 시체들에서 얻어낸 뼛가루들을 팔았고, 이 과정에서 필리핀의 마약왕이 된 것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창고 안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멀리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코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발견했다. 총이었다. 그 남자는 이상한 구호를 외치며 창고 안으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사내의 총에서 나온 총알이 내 앞으로 날아올 때 즈음, 나는 잠에서 깨어나듯 거리에서 정신을 차렸고 내 앞엔 아까 보았던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서있었다. 나는 홀린 듯 주머니에서 해골 가루가 든 봉지를 꺼내 아이들에게 주었고, 아이들은 원하던 것이라는 듯 웃으며 사라졌다. 아이들의 빈자리를 보며 나는 내 앞니를 더듬었고, 앞니의 빈자리를 느끼며 꿈에서 깼다.

함동민(영상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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