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오래전에 던졌던 그에 대한 소박한 질문들의 대답들이
내앞 최후의 만찬 속 주인공들을 통해서 한결같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새는 지방취재를 하고 나서 새벽에야 서울로 올라온 나는 다음 날에도 내가 해야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아내는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둥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여타의 이유를 들어서 자신의 나들이에 막내 딸 휘연이와 나를 강제로 동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을 향해 외출하려는 아내의 두툼한 코트 끝자락과 가볍디가벼운 저 발걸음을 잡아두고 싶었으나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소 도살장 끌려가듯 하릴없이 미술관에 끌려갔고 결국 크리스마스의 황금 같은 휴일을 전혀 예기치 못한 서양화들을 보며 보내게 되었다. 모처럼 만의 휴식을 잠이나 실컷 자며 쉬고 싶었건만 그것도 쉬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탐탁치않은 외출이었으므로 미술관의 그림들도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미덥지 않은 시선으로 그림들을 툭툭 쏘아보다가 막내 휘연이가 멀뚱히 주시하는 큼지막한 액자 속으로 눈동자가 옮아갔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찬을 갖는 신약 복음서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 말이다.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들이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엄숙한 그림부터 상상하기 마련이지만 예전부터 나는 최후의 만찬을 생각하면 으레 유다의 치졸한 배반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부터 연상하고 만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내 두뇌가 그 기억을 얼마나 심하게 각인하고 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고등학교 기숙사에 걸려있던 낡은 그림, 최후의 만찬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아동용 서양미술사라는 책자로부터 시작된 그림, 최후의 만찬과의 인연은 뭔가를 암시하는 듯 오늘날까지 심심찮게 내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아내의 갑작스럽고 억척스런 미술관 나들이에 이끌려 다시 한번 최후의 만찬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오른편 첫 번째에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앉아 있고,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요한의 어깨를 잡고 누가 배신자인지 물어보려는 듯 일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왼편에는 예수의 용모와 제스처를 닮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양쪽 팔을 벌리고 비극을 예감한 듯이 공포에 싸여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의 표정과 제스처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디테일 하게 그려져 있어서 내가 실제로 만찬을 즐기는 그림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역시 유다의 배반과 관련지어 그림을 주시하던 나는 갑자기 최후의 만찬에 얽힌,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한 일화와 그에 대한 기억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자꾸만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일화는 역시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한두 번 정도 들어봤음 직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대강의 내용을 말하자면 이렇다. 다 빈치는 이 그림을 그릴 때에 어떤 젊은이의 얼굴을 모델로 삼아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당시 모델이 되었던 젊은이의 얼굴에는 사랑과 진지함, 순수함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다 빈치는 일 년 동안 사도들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마지막으로 배반자인 유다의 얼굴을 그려 넣을 차례가 되었는데 적절한 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 돌아다녀도 스승을 배반한 어두움과 악으로 가득 찬 얼굴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곤죽이 된 한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이 사람이다 싶어 얘기를 하다 보니 놀랍게도 그는 몇 년 전 그리스도의 모델로 삼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의 명성에 걸맞은 유명하고 오묘한 내용의 일화이다. 나는 이 일화를 기점으로 그에게로 다시 한번 돌아가려 하고 있다. 흰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보이고, 주름살 마저 푹 파여 버린, 불혹의 나이에 20여 년 전의 옛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지만 지금 이 그림은 나를 20여 년 전의 그때로 되돌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하려는 이 이야기는 그에 대한 의리감이나 우정의 발로일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그에 대한 외경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암초라고 생각했었던 그와 마주쳤고 그가 죽고 사라진 20여 년 후의 지금에서 나의 인생을 반추시키고 있는 그가 나의 등대였음에 이제야 확신이 서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수업이 모두 끝나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교실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한다. 교실에선 겨우내 쌓였던 케케묵은 악취 대신 상큼한 봄내음이 진동하고 학교 뒷산에는 희디 흰 목련 이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신입생들은 기숙사에 입사 준비를 하고 졸업을 코 앞에 둔 3학년들은 퇴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3학년인 나 역시 신입생들의 입사를 위해서 기숙사의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 본관 건물을 빠져나오자 중간에 자리한 운동장을 위시해서 왼쪽에는 매일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중학교 건물, 오른쪽에는 특수 재료로 만들어진 조립식 건물인 노란색 체육관, 그리고 정문 옆 3층 건물인 적갈색 기숙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정문 옆의 기숙사를 향해서 운동장 우측에 있는, 우레탄 바닥의 판판하고 질감있는 농구 코트를 통과하고 이어서 나타나는 울퉁불퉁한 콘크리트길을 걸어간다. 본관에서 기숙사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러니까 교칙에 따르자면 운동장을 가로질러선 안 된다. 교내 가장자리에 있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반원을 그리 듯이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업도 끝났겠다 보는 사람도 없겠다 하고 생각한 나는 서둘러 지름길에 몸을 맡긴다. 이윽고 나는 기숙사 건물 앞에 다다른다. 학교 담벼락의 배수관부터 시작해서 기숙사 옥상의 물탱크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초록색의 담쟁이덩굴은 붉은 벽돌의 기숙사 건물마저도 초록색으로 물들이려는 듯이 힘껏 움켜쥐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기숙사 입구 난간에 붙어 있는 질긴 담쟁이덩굴의 줄기를 이유 없이 뜯어버리고 2층의 내방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 희멀건 먼지투성인 그림, 최후의 만찬이 보인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사감은 그림에 손을 대는 녀석은 가만 두지 않는다며 사생들에게 엄포를 놓곤 했다.

낡은 이층 침대와 문구용 칼자국들이 난잡한 책상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허한 방에 나는 서 있다. 방안의 조그마한 미세기창을 통해서 날카롭게 입사하는 저녁 노을의 붉은 햇살이 마치 무대 위에서 고독한 역할의 주인공을 비추는 둥그런 조명과 같은 느낌이다. 나는 그런 적요한 방 한가운데 서서 그가 잤던 침대의 일층 칸을 살펴보고 그의 책상을 더듬어 본다. 그는 지독한 고소공포증이 있었는데 그것은 2미터가 조금 못되는 높이의 침대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어 그는 항상 일층에서 자야만 했고 난 이층에서 자야만 했다. 나는 그런 침대를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맞은 편 그의 책상으로 고개를 돌린다. 책꽂이에는 그가 즐겨 읽었던 존 어빙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대, 여섯 권과 교과서 몇 권이 꽂혀져 있고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릴린맨슨의 시디가 그 옆에 놓여 있다. 어디선가 마릴린 맨슨의 무겁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타고 파이트 송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 나는 잠시 적막의 리듬 속에 몸을 내맡겨본다. Nothing suffocates you more than the passing of everyday human events Isolation is the oxygen mask you make your..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책들을 뒤적이면서 그의 필체를 잊지 않으려는 듯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가 죽고 없어졌지만 아직도 이 방은 그, 특유의 차가운 기류가 흐르는 것만 같아 자꾸만 나는 몸에 소름이 돋고 만다.

마치 결벽증 환자처럼 정리벽이 있던 그가 남기고 간 자리는 놀랄 만큼 깨끗한 편이다. 그의 책꽂이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희뿌연 먼지만 제외한다면 마치 날마다 누가 방을 청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나는 그의 정리벽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만다.
책상을 정리하던 나는 책상 서랍 안의 귀퉁이에서 그의 빛 바랜 일기장을 발견한다. 두꺼운 골판지로 된 표지에 그의 사인이 있다. 마치 지렁이 두 마리가 꿈틀대는 것 같고 난해한 이란 어, 파르시의 철자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인은 그처럼 난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사인을 유심히 살피면서 일기장을 읽어보기로 한다.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것이 못내 꺼림칙하지만 나는 그의 침대 칸에 앉아서 마지막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는, 그의 유품인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정독한다.

‘19xx년 x월 xx일
기숙사에 입사한 지 서너 달 정도 되었다. 기숙사 생활은 정말 미칠 것만 같다. 룸메이트 녀석이 조용한 성격이라 다행이지만 그 외 녀석들은 전부 바보들뿐이다. 입만 열면 여자와 잔 얘기뿐인 D는 변태이자 정신병자다. 그 녀석은 언젠가 성도착증에 빠져서 여자 속옷이나 수집하러 다닐 것이 분명하다. 녀석이 다시 말을 걸어오면 나는 정말 놈을 죽이고 싶을지 모른다. A 패거리들은 생각하는 게 형편없이 어리석은 녀석들이다. 난 그 바보들이 왜 그렇게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는 지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물렁살에 배만 나와서 시비나 걸고 다니는 걸 보면 역겨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이런 녀석들과 생활하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19xx년 xx월 x일
주걱턱이 또 들이닥쳤다. 오늘로서 세 번째다. 그 놈은 감시하는 데에만 인생을 걸고 있는 것 같다. 밤에 몰래 술을 마시는 지, 담배는 피워대는 지, 이상한 비디오를 보고 있는 지, 내가샐린저의 소설을 보고 있을 때마다 그가 어김없이 문을 열고 도끼눈을 부릅뜨며 우리를 쳐다보는 꼴이란 역겹다 못해 불쌍하다. 아무래도 주걱턱은 직업을 교도소장으로 바꿔야만 할 것 같다......’

그가 쓴 내용은 기숙사 생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가 생각보다 더 삐뚤어졌고 학교와는 거리가 먼 문제아라는 것 이외에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일기를 읽고 여자와 돈밖에 모르는 D를 그가 그토록 혐오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약간 당황했다. 나 역시도 사실 D에게서 여자 나체 사진 몇 장을 빌려 마스터베이션을 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나도 혐오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죄 지은 사람 마냥 머리가 조아려지고 만다. 마지막까지 그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정말로 다행이다.

그의 일기에서마저도 그, 특유의 차가운 기류가 새어 나와 내 코끝을 시리게 만들고 있다. 그는 이 차가운 기류에만 녹아 있는 산소를 통해서 숨을 쉬고 살았는지도 몰랐다.
촘촘하고 다부진 필체로 빽빽하게 채워진 일기장에는 그의 차가운 숨결과 뜨거운 온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나로 하여금 그가 죽은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있다. 그는 분명 얼마 전까지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일기는 불과 얼마 전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기 전날 밤까지 말이다. 난 다시 서글퍼진다. 그가 결국은 죽고 만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사실 그 특유의 서늘한 기류를 통해서 나에게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죽음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나를 할퀴고 간 자리에는 상흔의 그림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의 죽음은 끝까지 그를 닮아 있다.

나는 나의 물건과 그의 물건을 대충 정리하고 기숙사방을 빠져나가기로 한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방을 힐끔 쳐다보았다. 노을에 붉게 그을린 방이 나로 하여금 사고 당시 그가 쓰러졌던 자리의 검붉은 핏자국들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거기에 서 있었다. 꾸역  꾸역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피를 토하며 나동그라진 그의 모습과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의 한 아이, 그리고 그 옆에서 데구르르 굴러가는 야구공 한 개를 무성 영화 속 흑백 몽타쥬처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그의 사고에 나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고 가구를 몽땅 걷어내 버린 텅 빈방처럼 나의 머릿속은 공허한 울림만이 맴돌고 있었다. 귀가 멍해지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만 주저앉아 버렸고 그가 쓰러진 자리에 낭자한 시뻘건 선혈만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가 다시 시끄러워진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얘지는 것이 반복되면서 그의 부르르 떨리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하나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려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다리가 경직되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았다.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 위로 하얀 눈만이 무색하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려오는 육중한 5톤 트럭에 치여 죽어 가는 사람의 표정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편안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일어난 그의 죽음이었다. 나는 그의 사고를 처음부터 목격하지 못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그가 트럭에 부딪혀 피를 토하며 수 미터 높이로 떠오르는 광경을 실제로 목격했다면 나는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이상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속이 거북해져 싯누런 색깔의 역한 위액과 이미 몸 속에 들어가 소화되기만을 기다리던 잡다한 음식물들을 역류시키고 만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언론에 공개되면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화려한 죽음을 맛보고 일생을 마감했다. 나는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해 둔 그의 죽음에 관한 신문기사를 다시 한번 꺼내어 본다. 그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는 투명하리 만치 하얀 피부와  양키들처럼 오똑한 코 그리고 날렵한 눈매, 얇고 붉그스름 한 입술의 말쑥한 외모를 가진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그의 기사를 다시 한번 읽는다. 모일 모시에 일어난 사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청년. 마치 찬양 조 기사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어색하지만 진지한 웃음을 지어 본다.

아내에게 이끌려 온 미술관의 그림들은 주로, 유명한 서양화들의 이미테이션들이다. 큐레이터의 집요한 설명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아내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한자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나는 큐레이터보다 그녀의 집요함에 손을 들어버리고 만다. 어쨌든 나는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인물들인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가리옷 유다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도 다 빈치가 그린 가리옷 유다 만큼은 눈에 확 띄는 것이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전통적인 최후의 만찬과는 다르게 가리옷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앉히는 관용을 베풀고 있다. 그러나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는 가리옷 유다는 유일하게 어두운 그늘에 앉혀 빛 가운데 앉은 다른 제자들과 구별시킨다.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나는 유다를 다시 한번 살핀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유다. 동기야 어찌되었든 그를 배반했던 L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유급을 받은 그 사건은 L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할리 데이비슨 사의 스포스터를 타고 도로를 질주한다. 그의 스포스터 뒤에는 언제나, 그의 집안이 굉장히 부유할 것이라는 소문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그 소문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지역 지주라고도 하고 국회의원의 아들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아들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기숙사 앞에선 매일 그의 값비싼 스포스터가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울긋 불긋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집안이라면 고등학생에게 그런 비싼 물건을 선뜻 사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내게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만큼은 과묵했던 평소 보다 더욱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신의 집안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포스터를  타고 자동차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질주하며 오토바이 특유의 경적소리를 연신 울려대고 있다. 도로를 꽉 메운 자동차들은 마치 꼬리를 물고 줄지어 늘어선 굼뜬 거북들 같다. 나는 자동차를 굼뜬 거북이로 생각한다. 거북들은 어디론가 향하려 하지만 교통 대란에 옴짝달싹 못한 채로 서로 붙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우리는 그 사이를 비켜가며 질주한다. 우리는 속도를 즐기며 괴성을 질러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의미 모를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K의 오토바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불빛과 요란한 경적들에 거북들은 등판 속에서 고개를 내밀며 욕지거리를 해댄다.
“야 이 새끼들아 당장 도로에서 꺼지지 못해? 이 후레자식들아!”
“저런 망할 새끼들 콱 뒈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들의 욕지거리에 우리들은 더욱 요란한 경적과 현기증 나는 현란한 불빛들로 화답하고 역시 돌아오는 것은 그들이 놀리는 악다구니뿐이다. 우리는 달리고 있다.
나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수놓아진 밤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향해서 우리는 이토록 달리고 있는 걸까’

나는 K와L 그리고 P와 함께 도로를 장악한다. 급기야 먼발치에서 우리들을 쫓는 ,비상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 몇 대가 출동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추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욱 속도를 내며 바람을 가르고, 결국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경찰 차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쫓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포기했다. 그들의 추적은 항상 의례적이고 사무적이었으며 그들의 얼굴은 모두 ‘저러다 말겠지’ 하는 뚱한 표정들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들쭉날쭉 도깨비처럼 나타나는 우리들의 질주에 그들도 질려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무래도 그가 저지른 일이 내심 불안했다. 순찰하러 공원에 주차되어 있던 빈 경찰 차의 창문을 이유 없이 그가 각목으로 부숴 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느닷없고 난해한 행동에 놀랄 틈도 없이 오토바이에 올라타 도망을 쳐야 했다. 그는 경찰들에게 이유 없는 반감을 가졌다. 아니 어른들에게 모두 반감을 가졌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가식덩어리들 뿐이야! 정치한답시고 부패를 저지른 국회의원들이 뉴스에 나와서 꼴 같지 않은 변명들을 늘어놓거나 집에서는 아동학대하는 부모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걸 보면 난 정말 어른으로 자라고 싶지 않다니까”

나는 그에게 어른들에게 반감을 갖는 이유에 대해 물어 보려 했지만 그냥 교과서에서 주워 들은 대로 청소년기에 으레 경험하는 반항의식이려니 하고 간단히 웃어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어른들과는 반대로 그는 어린이들에게만큼은 굉장히 관대하였다.

수업종이 울림과 동시에 나는 그와 함께 으레, 학교 후문 옆의 야트막한 무덤 가 언덕배기로 향하곤 했다. 그리 높은 편도 아니고 낮은 편도 아닌 작고 아담한 그 무덤 가 언덕배기는 듬성듬성 솟아 있는, 음산한 무덤 몇 개만 제외하면 수업 후에 담배를 피며 상쾌한 공기를 쐬기에는 정말 제격인 곳이었다. 특히 언덕 꼭대기에 아름드리 서 있는 은행나무의 그늘에 누워서 낮잠이라도 즐기는 날은 수업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을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뜨내기 화가와 자신이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는 ,턱수염만 질펀하게 자란 삼류 화가를 상상하며 그의 말에 곧 수긍하고 말았다. 그럴 것이 만약 그가 정말 이 언덕배기의 화가였다면 그는 항상 어린이들이 뛰노는 광경만 그리는 싸구려 화가일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런 몽마르뜨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뛰놀기 좋은 몽마르뜨의 특성상 주변 주택가의 꼬마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놀고 있는 날에는,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을 쳤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아이들과 장난치며 노는 날에는 멀리 떨어져서 혼자 담배를 피우며 그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광경을 의아한 표정으로 구경하곤 했다.

“저 아이 이 드러내면서 웃는 것 좀 봐라 너무 귀엽지?”

그는 아이들과 흙장난하던 손을 훌훌 털더니 내게 말하며 평소에 보이지 않던 정말로 기뻐 보이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그런 표정은 언제나 어린이들과 함께 할 때뿐이었고 나는 그때 그를 약간은 유치한 인물이라고 단정지었다.

우리는 한강에 가서 술을 먹기로 한다. 술고래 K가 급하게 공수해온 소주 10병을 시원한 밤바람과 암청색 강물을 안주 삼아 들이킨다. 그와 P는 연신 소주만 마셔대고 K는 갑자기, 마시던 술병을 강물에 던지고 고개를 한참동안 주억거리더니 목놓아 울어버린다.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시는 나는 목놓아 우는 K를 위로하며 그에게 술 한잔을 더 권한다. 한편 L은 술을 마시다 말고 일행에서 이탈하더니 근처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에게 시답지 않은 시비를 걸고 있다. 우리는 저러다 그만 두겠지 하며 웃어넘기고 만다. L의 취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L은 초 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피난 온 한 평화로운 가족에게까지도 시시껄렁한 시비를 건다. 급기야 L이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과 주먹다짐을 하는 상황까지 보이자 우리는 순간 긴장하지만 나는 L의 평소 성격을 잘 파악하던 터라 그의 행동이 곧 멈출 것임을 자신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만다. L이 그의 아들로 보이는 꼬마아이에게 화풀이로 발길질을 하고 급기야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과 주먹질이 오가고 만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둔탁하고 낯설은 느낌에 새우잠을 곤히 자다 눈을 뜬 아이는 L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마자 엉엉하고 지독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신 술만 마시던 그의 얼굴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가 그렇게 황망한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일어서더니 L에게 달려가 술에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녀석을 몇 대 때리고 짓밟더니 자신의 스포스터를 타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우리는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기만 했고 우리의 그 날밤 비행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다. L만큼이나 그의 돌출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날이 왔고 우리는 수업을 빼먹고 당구를 쳤으며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그런 한가한 시간은 잠시였을 뿐이었다. 무더위 속을 헤치고 학교를 찾아온 경찰 차 한 대가 그를 데려갔고 학교에선 그에게 유급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L이 그가 경찰 차의 창문을 부순 사실을 고자질한 것이었다. 나는 L이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의 그가 한강에서 그에게 당한 일을 그렇게 보복하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어찌됐든 그는 유급처분을 받고 학교에 한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기숙사 복도 끝에 걸린 최후의 만찬 속 유다처럼 녀석은 배신 했고 그는 사라졌다.

기숙사 앞에서 언제나 훌륭한 자태를 뽐내던 그의 스포스터가 없어지고 난 뒤에서야 나는 그가 유급처분을 받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 으레 그와 함께 가던 무덤 가 언덕배기, 몽마르뜨로 홀로 향한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교복바지 밑단에 숨겨둔 담뱃갑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빼어들고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이 들어 있는 주머니 속에서 몇 방울의 기름밖에 남지 않은 라이터를 꺼내든다. 불어오는 바람에 라이터 불이 몇 번 꺼지고 나서야 바람을 등지고 겨우 불을 붙이는데 성공한다. 나는 정체 모를 누군가의 무덤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때마침 놀러 온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한다.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대 여섯 살이나 먹어 보이는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는 장면이란 앙증맞기 짝이 없다. 포니 테일 머리를 하고 하얀색 블라우스에 오드리 햅번을 생각나게 하는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여자아이가 술래다.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다른 아이들을 잡으려고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마치 고삐 풀린 철없는 망아지 같다. 까까머리를 한 남자아이는 연신 소매로 콧물을 훔치고 있고 그 소매에 묻은 콧물들이 금세 한데 엉켜 붙어서 딱딱해지고 만다. 아이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술래잡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그가 옆에 있다면 아이들과 술래잡기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상 만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어서 나는 자꾸만 킥킥대며 웃고 만다. 나는 그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두 번째 담배를 비벼 끌 때까지 주시한다.

포니테일 머리에 공주 차림의 여자아이와 때가 심하게 타서 거무튀튀한 민 소매 상의에, 헤져서 올이 다 풀어진 반바지를 입은 저 까까머리 남자아이. 확연하게 다른 두 아이의 모습은 내 방의 맞은 편 J와S를 떠올리게 만든다. 실장인 J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의사이자 치맛바람이 드센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그의 주변엔 언제나 모기떼 같은 녀석들이 득실거리는데 대부분 부유하고 엘리트라고 자칭하는 녀석들이었다. 모든 분야에 상위권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인물들을 경멸하고 혐오하였으며 무시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꼴이란 마치 ‘누가 누가 잘났냐’를 가리는 기묘한 대회의 치졸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나는 그렇게 우쭐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녀석들을 애초에 본 적이 없었다.

S는 우쭐하게 살지도 않고 부모님도 평범한 분들이었다. 그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이란  성적도 우수한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모가 뛰어나게 잘생기지도 않았으며 특별한 재주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와 비슷한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자꾸만 쓰디쓴 웃음만 나오고 만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뒤로하고 발로 비비던 담배꽁초의 불씨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담배와 라이터를 챙기고 다시 교실로 향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그가 사라진 후에도 기숙사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D는 여전히 포르노물을 수집하며 여자와 잔 얘기를 떠벌리고 있었고, L은 그 비쩍 마른 몸에 어울리는 간교한 웃음을 짓고 다녔으며 옆방의 M은 언제나 그랬듯 검은색 뿔테 안경을 어루만지며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가 유급을 받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인 느낌이다. 함께 어울려서 질주를 즐기던 K도 자신은 유급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 그가 유급처분을 받은 사실에 대해선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인 것 같고 선생님들도, 성적도 썩 좋지 못하고 말썽만 피워 문제아라고 낙인 찍혔던 그가 학교를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학교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어느 누구한테도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벌레 한 마리가 발에 밟혀 죽은 것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불현듯 몽마르뜨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외엔 중요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지. 물론 너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야.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말도 있잖아.”
“인간관계라는 것은 내가 뿌리는 것만큼 돌아오지 않아. 아니 어른관계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지. 이것저것을 맞춰보고 철저하게 계산한다는 얘기야.”
“내가 어른 관계라고 했지? 최소한 아이들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에 정신 못 차리는 녀석들이 바바리코트로 있는 폼을 다 잡는 가을 즈음이었다. 검은색 리무진이 학교에 다녀간 다음 날부터 그가 학교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리무진에서 그와 같이 내린 사람이 그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횡횡히 나돌았고 나는 그때 그로부터 그의 집안에 대해서 간략히 듣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소문대로 시 국회의원이라는 것, 그의 아버지가 올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가장 많이 받았던 부패한 국회의원이었던 것,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무척이나 혐오하고 있었던 것 등등이었다. 그는 내가 생강즙을 혐오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아버지를 싫어하고 있었다.

“난 아버지가 싫어. 아버지가 꾸미는 꿍꿍이는 언제나 더러운 시궁창냄새가 났지. 사실 작년에 염색공장에서 오물을 강으로 방류한 사실을 묵인하고 그 공장장 녀석 감쌌던 장본인도 바로 우리 아버지야. 물론 거금을 받아 챙겼겠고.. 언제나 돈으로만 해결하시려는 분이니까. 이번 유급도 우습지만 돈으로 교장을 살살 구워냈겠지.. 모처럼 만의 휴가였는데.. 제길..”

어찌됐든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어서 나는 매우 기뻤다. 구세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인간처럼 기뻤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고 나서도 기숙사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담쟁이덩굴의 짙푸른 잎들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칙칙한 회색의 줄기만 드러낸 채 앙상하게 기숙사 외벽에 붙어 있는 모습과, L이 주방의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생쥐 마냥 그를 살살 피해 다니는 모습, 그리고 그의 스포스터가 다시 기숙사 앞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 이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루한 수업이 반복되는 끝없는 평행선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수업일정표에 깨알 같이 쓰여 있는 수많은 수업들이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기를 반복하더니 가을이 깊어질대로 깊어지고 교실에 히터가 가동되던 어느 날 시린 겨울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굵은 빗줄기를 뿌려대던 겨울의 시작은 여기저기서 트렌치 코트의 물결을 탄생시켰고 심장 언저리에 서리가 맺힐 만큼 춥던 12월 어느 날 첫눈이 함박 내렸다. 그러나 첫눈의 경이로움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의 사고와 동시에 평행선의 정적은 무참히 으깨지고 말았다.

나는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그리스도를 몇 분 동안이나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불현듯 그리스도의 자애로운 웃음을 머금은 얼굴과 희미한 웃음이 사르르 번지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며 오래 전에 던졌던 그에 대한 소박한 질문들의 대답들이 내 앞 최후의 만찬 속 주인공들을 통해서 한결같이 메아리치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제법 쌀쌀하고 을씨년한 날씨가 금방이라도 눈을 펑펑 쏟을 것만 같더니 결국 미술관의 두꺼운 창문 밖으로 순백의 눈이 내리고 있다. 그가 죽었던 그 해 겨울의 함박눈 마냥 무던히도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그를 생각한다. 귓전을 때리고 있는 커다란 시계추의 리드미컬한 템포에 맞춰서 그의 건조한 육성과 메마른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되새겨보고 있다.

첫눈의 강하와 동시에 세상을 등졌던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지금도 그 서늘한 이상 기류를 나에게 내뿜고 있다. 어디선가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들려온다. 나는 자꾸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그가 즐겨 들었던 마릴린맨슨의 파이트송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옆에 서서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막내 휘연이의 고사리 손을 꼬옥 감아쥐어 본다.

 

[소설입상소감] 황인용(인과계열2)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을 타진한 것
 
 미숙한 내가 문학을 이야기하고, 글을 논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모멸감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느닷없는 당선 통보에 기뻐할 틈도 없이 나의 말장난 같은 유치한 글이 지면에 옮겨진다는 사실은 못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어떠한 지향점도 없이 맹목적으로 펜을 휘둘렀고, 뜨거운 가슴으로 문학을 품지도 않았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일천한 내가 근 한달 동안 쥐어 짜내듯 쓴 보잘것없는 글이 가작으로 선정된 데 대하여 문학을 진정 사랑하고 아끼는 문학도들로부터 질타나 받지 않을는지 자못 우려가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 소설 가작 입상자 황인용(인과계열2)

진정한 글은 단순히 글재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글 속에 자신이 굽이쳐 온 삶의 질곡을 얼마나 농밀하게 응축시키는가에 달렸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제 겨우 약관을 살아가는 밋밋한 청춘일 뿐이지만 동시에 무한하게 남은 가능성의 영역을 타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 가작 당선은 나로 하여금 문학과 글 쓰기, 그리고 내가 살아온 삶과 내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숙성(熟省)하는 구심점의 의미를 갖게 했을 뿐,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의미는 아니다.
완숙하지 못한 졸작을 가작이라고 뽑아주신 교수님께 죄송함과 감사함을 전하며, 내가 몸담고 있는 행소 문학회의 제 동인들에게 이 멋쩍은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