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철현 기자 (gratitude@skkuw.com)
사진 l 박철현 기자 gratitude@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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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에 닿기까지
백남준 예술관의 키워드는 ‘플럭서스’다. 플럭서스는 상품화되는 전통예술, 사회와 동떨어진 예술을 반대하는 전위예술 운동이자 예술가 집단이다. 백남준은 비디오예술가이기 전에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 불릴 정도로 실험적이고 저항적인 플럭서스 전위예술가였다. 3분가량 서서히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고 단숨에 내리쳐 산산조각내는 <바이올린 독주>와 같은 퍼포먼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백남준은 청소년기에 작곡가 이건우로부터 아널드 쇤베르크를 알게 된다.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에 7개의 음을 사용하는 기존 음악의 전통을 부수고, 모든 음은 평등하다는 철학 아래 한 옥타브에 12개의 음을 사용하는 ‘12음 기법’을 제시했다. 소년 백남준은 쇤베르크를 “서양음악에서의 고질적 계급을 소멸시킨 전위예술가”라 말했다. 쇤베르크 음악에 대한 관심은 청년 백남준을 존 케이지의 공연으로 이끌었다. 케이지는 연주 시간 동안 연주를 하지 않는 <4분 33초>로 유명한 작곡가다. 그의 연주로 백남준은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고, 음악이 옥타브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후 1959년부터 백남준은 음악을 소재로 한 퍼포먼스에 과격한 제스처를 동반했다. 앞서 언급한 <바이올린 독주>에서 그는 전통음악의 대표 오브제인 바이올린을 부수고,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이내 파괴하고 관객으로 앉아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잘랐다. 세계비엔날레협회 이용우 회장은 저서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에서 백남준이 플럭서스에 닿기까지를 “아널드 쇤베르크로부터 반항적인 예술정신을 배우고, 존 케이지에게서 실천 영역의 방법론을 배운 것”이라 설명했다.

예술과 기술의 만남
백남준은 1963년 독일의 부퍼탈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대중문화의 우상으로 불린 텔레비전을 관객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다. 텔레비전이라는 오브제는 그 기본 속성이 관습적이고 수동적인 전통음악과 닮았고, 그의 플럭서스 정신을 자극한 것이다. 백남준은 영사막을 뒤집어 두는 등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관객이 텔레비전을 발로 밟아야 작동되게끔 조작했다. 이 전시는 비디오예술의 첫 페이지에 기록됐다. 이후 백남준은 텔레비전 및 전자 기술 연구에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본인 기술자 아베 슈야와 함께 비디오 이미지를 비틀고 색을 변형시키는 ‘비디오 합성기’를 개발했다. 이를 활용해 1973년 그는 비디오테이프 <글로벌 그루브>를 만들었다. 이용우 회장은 “사실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비디오의 다큐멘터리적 속성에 정면 도전하여 예술적인 형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했다”고 작품을 평했다. 나아가 <글로벌 그루브>의 영상 재료는 후에 백남준 비디오 작품 대다수에 주재료로 사용됐다.

1969년 뉴욕, 백남준은 ‘창조적 매체로서의 텔레비전’ 전시회 카탈로그 글에서 “모든 기술도 인간화되지 못하면 기술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예술도 인간화되지 못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로 전락한다”고 기술했다. 이용우 회장은 삶과 예술의 괴리에서 번뇌한 백남준의 고민을 △관객이 텔레비전 위에 눕도록 유도한 <TV 침대> △인간의 신체에 가깝게 설치한 <TV 브라> △열대식물과 나무 사이에 20~30대의 텔레비전을 배치한 <텔레비전 정원>에서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백남준은 한국에서의 첫 전시작품을 위해 아트마스터 이정성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전자기술자로 살아온 내가 예술가와 동고동락할 것이라 상상할 수 없었고, 꿈꿔 본 적도 없었다”고 운을 뗐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있는 <다다익선>으로 백남준과 첫 호흡을 맞췄다. 무려 텔레비전 1003대를 쌓아 올린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전기 신호를 같은 크기로 분배하는 ‘증폭분배기’를 직접 고안했다. 시중에 출시된 분배기는 신호를 6개로 나눌 수 있지만, 그가 만든 분배기는 22개로 나눌 수 있었다. 백남준조차 2/3 정도의 화면만 나와도 성공이라고 말한 <다다익선>은 이 대표가 두 달여간 손이 부르트도록 만든 약 85개의 증폭분배기와 그 밖의 노력이 더해져, 1003대 모두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백남준과 각별한 연을 이었다. 백남준이 작품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하듯, 자신의 기술자와 식당에서 밤새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식당에서 받은 종이 위에 작품의 초안을 작성하고, 작품의 내용과 기술적 가능성을 검토했다. 가능성이 모호하면 이후 작업실에서 그것을 실험하고 개발했다.” 이 대표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모국어로 작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섬세하게 내게 전달됐고, 이런 교감을 지속하다 보니 작가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백남준으로부터 작품 보수를 위임받았다. 세계에 위치한 백남준의 작품이 그의 손으로 생명을 연장하곤 했지만 <다다익선>만은 지난 1년간 어두운 탑으로 남아있다. 텔레비전의 개수도 많고 필요부품을 구하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다다익선>을 두고 예술계의 논의를 살펴보면 작품을 원상 그대로 보존하자는 측과 화면을 브라운관에서 LCD와 같은 현대기술로 바꾸자는 측으로 나뉜다. 이에 이 대표는 “작품에 쓴 텔레비전은 작가가 편집한 비디오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의견을 표했다. 이어 “텔레비전의 프레임은 그대로 둔 채 화면 영사 방식을 바꾸면, 외형도 보존하고 작가가 혼을 쏟은 비디오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용우 회장은 그의 저서에서 “비디오예술이라는 것이 비디오 조각이나 설치 등 물리적 부피를 갖는 하드웨어에 집착해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백남준의 입체작품은 비디오테이프가 함께 방영될 때만 작품이 완성된다”고 밝혔다.

비디오예술가 백남준 
물리적 작품과 비디오 사이의 관계는 중요하다. 조정환 작가는 저서 플럭서스 예술혁명에서 “백남준은 관계성에서 미(美)를 끌어낸다”고 설명한다. 그는 “백남준은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장르 △비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 △전기나 전자와 같은 기술을 서로 접목해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식의 탄생을 추구한다”고 봤다. 비디오예술은 그것을 시각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어 조 작가는 “백남준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면서 예술을 확장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기술에 대한 관심은 텔레비전을 매개로 비디오예술에서 위성예술로 예술적 시공간을 확장했다. 사물을 전통적인 관념에서 탈피하고, 이를 관객과의 쌍방향 소통으로 바꿔놓은 후, 이 관계를 점차 확장해나간 것. 이것이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이다.

이정성(왼쪽)과 백남준.
ⓒ이정성 제공.
백남준의 1998년 작품 다다익선.
백남준의 1998년 작품 <다다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