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마녀 이야기>

내가 마녀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꼭 열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그 해의 난 스무 살이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모가 마녀 조합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 조금 코웃음 쳤다.

 

난 바빠요, 이모.

누가 몰라? 요새는 애들이 제일 바쁘지.

 

이모는 내 투정을 아무렇지 않게 묵살하며 덧붙여 말했다. 

 

마녀가 되는 일에 나이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리고 이모는 내게 주소를 하나 주었다. 나는 건성으로 읽어내렸다. 그 주소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상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바쁜데.

싫으면 마라. 강요해서 될 일도 아니니까.

 

이모는 그렇게 말한 후 더이상 나를 설득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소가 적힌 쪽지를 대충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 때까지는 정말로, 마녀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 후의 나는 방을 전부 뒤집어서 그 때 이모가 주었던 쪽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마녀에 대한 나의 입장이 이렇게 백팔십도 바뀐 것은, 모두,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미색의 종이, 파란색 글씨, 직선의 끝이 구부러져있는 아름다운 필기체의 그 편지. 

 

나는 모두가 자습을 하러 지하로 내려가고 난 방과 후의 텅 빈 교실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 사물함 문틈에 슬쩍 끼워져 있었다. 나는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그 봉투를 틈에서 빼내어 손에 쥐었다. 수신인은 나, 발신인은 이안. 바로 그 집필자 클럽의 이안.

 

집필자 클럽에 들어가는 건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내내 꿈꿔온 일이었다. 집필자 클럽의 일원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 자습시간 내내 글을 쓸 수 있었고, 매년 나오는 학교 문집에 이름을 실을 수도 있고, 상위 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집필자 클럽이 그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점은 학교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진실한 이야기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우정이라니! 나는 매년 봄 집필자 클럽에 지원했었고 올해는 꼭 세번째 도전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지난 2년동안 번번이 이 도전에서 탈락해왔던 것이다.

 

나는 올해 졸업학년이었다. 이번에 붙지 못하면 이 이상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사물함에 꽂힌 편지를 보았을 때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지금까지 탈락 통지를 따로 받은 적은 없었다. (오로지 침묵뿐이었지. 이 왕재수들!) 분명 이 미색의 종이 위에, 새파랗고 크고 아름다운 글씨로 '환영합니다'라고 적혀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었다. 이제야말로 집필자 클럽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나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 삼분할로 접힌 얇은 편지지를 꺼내고, 펼쳤다.

 

여러분, 저것이 바로 택도 없는 기대를 배반당한 자의 뒷모습입니다.

 

뒤에서 과장된 연극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펼쳐진 편지지를 망연히 쥔 채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이 위에는 새파랗고 크고 아름다운 글씨로, '유감입니다!'라고 적혀있었고, 등 뒤에는 이안을 비롯한 집필자 클럽의 소속원 몇 명이 거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안녕, 비카.

 

이안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겨우 되물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게...뭐야?

보는 대로지. 너는 떨어졌어. 언제나처럼.

 

이안이 책상들 사이로 몇 발자국 가까워졌다. 뒤에 서 있던 다른 녀석들이 킥킥거렸다.

 

그런데 좀 불쌍하더라구. 주제도 모르고 매년 입부 원서를 넣는 이 가엾은 친구가, 왜 자기가 매번 탈락하는지도 모르고 헛수고를 하는 게.

....

그래서, 이번엔 그 이유를 알려주러 왔지. 상냥하게.

 

이안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꽁꽁 얼어서,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이안의 앞에 무방비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이안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비카, 문제는 말이야, 네가 마녀의 일족이라는 거야. 우리는 마녀를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왜?

마녀들은 늘 불만이 너무 많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금방 저주를 걸려고 하잖아. 꺼림칙하다고. 아무도 마녀와 함께 활동하고 싶어하지 않아. 몰랐어?

난....

이제는 알게 됐지, 그지?

 

이안이 씩 웃었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너네 마녀들하고 마녀 클럽을 만들던지 하고, 집필자 클럽에 들어오겠다는 꿈은 버리도록 해.

 

이안은 마지막까지 악랄하게 말하고는 친구들을 이끌고 교실을 떠났다. 나는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서 멍하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혼자 들떴던 감정들이 전부 한심하게 느껴졌다. 파란색의 다섯글자가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눈 앞에서 빙빙 돌았다. 

 

나는 손에 들린 편지를 그대로 박박 찢어서 조각들을 쓰레기통 안에 전부 던져넣고 교실을 나섰다. 자습실을 향해서는 아니었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나는 책상을 샅샅이 뒤져 이모가 주었던 주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당장 집을 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화가 나 있었고, 그리 이성적으로 결정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순간 선택을 했다. 마녀가 되기로.

 

벨크룩 13번지 지하 2층을 향해, 버스는 멈추지도 않고 달려갔다. 그동안 나는 버스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생각했다. 나는 마녀가 될 것이다, 라고.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여름의 긴 해도 전부 저물어있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번지수를 읽으며 걸었다. 1번지, 3번지, 5번지가 지나가고 7번지, 9번지, 11번지도 지나간 뒤에 마침내 13번지가 나타났다. 나는 입구의 오래된 철문을 밀어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이 점점 뒤로 밀려날수록 분노와 흥분도 차츰 가라앉았다. 마치 본격적인 사건으로 돌입하는 이야기의 도입부처럼, 계단도 점점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문을 열었다. 점점 가까워지던 빛의 정체는 둥근 뚜껑이 덮인 형광등이었다. 창백한 불빛 아래에 몇 명의 마녀들이 모여 잡담을 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 내 쪽을 바라보았다.

 

오비카?

 

그 중에서 제일 머리가 긴 쪽이 나를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나는 약간의 어색함에 휩싸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네가 비카구나. 

비카가 누군데?

있잖아, 리사의....

아아, 그 조카....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수근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큰 목소리로 그들의 대화 한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전.

 

마녀가, 되려고 왔어요. 나의 선언에 마녀들이 제각각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상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머리가 긴 마녀는 나를 그들의 사이로 불러들여, 초록색 벨벳으로 감싸인 소파에 나를 앉혔다.

 

머리 긴 마녀의 앞머리 사이로 언뜻 눈동자 모양의 인이 비쳤다. 나는 그의 이마를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마녀가 될 것이다, 라고.

 

 

그래서 몇시간 후에 나는 이미 오른쪽 어깨에 삼각형 모양의 인을 지니게 되었다. 내게 인을 새겨준 머리 긴 마녀는 자신을 블린이라고 소개했다. 블린은 내가 몇십년만에 처음 가입한 신입이라며 즐거워했다. 

 

우리 지역의 유일한 마녀 모임인 성경험 조합은 여러 탄압과 박해 속에서 근근이 활동을 이어오다 몇년 전 처음으로 공식 조합으로 등록되어, 블린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녀들의 모습은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블린의 설명을 들었다.

 

뭐 궁금한 거 있니?

 

블린이 문득 이야기를 멈추고 물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 질문의 기회를 잡았다.

 

저주는 어떻게 걸어요?

저주?

어떤 애가 그러던데요, 마녀는 저주를 거는 존재라고요.

 

블린이 자리를 옮겨 내 옆에 앉았다. 블린은 내 손을 잡으면서 되물었다.

 

저주를 걸어서 어쩌게?

복수할 거예요.

이런, 너 화가 나 있구나....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블린은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블린의 말이 맞았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니야. 정당한 분노는 마녀의 덕목 중 하나이니까.

그러면....

하지만, 저주를 배우기 전에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어. 그 수업을 이수하지 않으면 저주도 배울 수 없단다.

 

블린은 내게 얇은 책 한 권을 꺼내주고, 머그컵에 밀크티도 따라주었다. 내년이면 스무살이 되는데 너무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마구 불평을 했다가 저주를 배우지 못하게 될까봐 잠자코 있었다. 나는 블린이 건네준 소책자를 휘리릭 넘겨보다가 제일 무시무시하게 디자인된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저주의 대가[대:까]

 

지금까지 저주가 마녀의 힘이자 약점이 되어온 역사를 간단하게 훑어보았다. 다음으로는 실제로 저주를 걸기에 앞서 마녀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주란, 마녀 자신의 꿈을 담보로 하여 어떤 개인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분명 마술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마술이 분명한 인과에 따라 세계에 관여하는 방식이라면, 저주는 대상 개인의 삶의 맥락과 더욱 연관된 것이다. '불행'이란 무엇인가? 이미 파산한 자에게는 파산이란 것이 전혀 눈썹 하나 까딱할 필요 없는 일이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선사하는 건 차라리 축복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불행이란 그 일개인의 삶의 서사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저주'의 필요성은 여기서 발생한다. '가능성의 극대화'란 저주의 객체가 이미 그의 삶을 통해 쌓아온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마녀의 저주는 가장 넓고 모호한 불특정다수를 향할 때조차도 보복의 형태를 하고 있다. 때문에 저주를 걸고자 하는 상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동시에  마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일 수 밖에 없다. 저주란, 그 스스로도 저주에 연루될 위험을 무릅쓴 후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저주의 대가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거기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아직까지는 그 말들이 크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블린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에 가져가도 돼. 한 번 읽어보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난 저주 거는 법을 한시라도 빨리 배우고 싶었고, 그래서 다음날 바로 자습에서 도망쳐 다시 성경험 조합의 문을 두드렸다. 마녀가 되었어도 아직 무언가가 변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하루종일 마녀를 겨냥하며 떠들어지는 한심한 비난들이 더욱 마음에 걸려서 괴롭기만 했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넨 그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블린이 반갑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왔구나, 비카. 얘는 내 조카야. 너랑 비슷한 나이라서 데려왔어. 어른들이랑만 놀면 재미 없잖니?

난 메이야.

 

메이가 싱긋 웃었다. 그 연초록색 눈동자가 어쩐지 섬뜩한 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그의 명찰이 2학년을 뜻하는 노란색으로 칠해져있음을 알아보았다. 나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키는 나보다 훨씬 컸다.

 

안녕, 메이.

 

나는 떨떠름하게 인사를 되돌려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메이가 금방 일어나서 나와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고모한테 들었어. 너는 벌써 인을 새겼다며? 대단해, 난 아직 고민중이었거든.

뭐어....

너 따라서 나도 새길까 고민하고 있어. 이것 봐.

 

메이가 자신의 오른 팔뚝 안쪽을 보여주었다. 파란색 매직으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보였다.

 

여기에 새길 거야.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마녀 친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그 뒤로도 메이는 계속 내 옆에 앉아서, 처음 마녀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느니, 마녀가 될지 말지 고민하는 이유라느니, 마녀로 사는 게 엄청 힘들다고 들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재잘거렸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블린에게 받은 소책자를 펼쳤다. 그래도 메이는 멈추지 않았다.

 

좀 읽어봤어?

 

블린이 구원자처럼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블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메이는 그제야 말을 멈추었다.

 

네. 

어려운 점은 없니?

다 어려운 걸요. 수업은 언제 이수할 수 있어요?

렛시에게 강사 자격이 있으니까 렛시랑 시간을 맞추면 돼. 메이도 이 기회에 미리 들어둘까?

 

메이가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빨리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뭘 하는지 모르게 바쁜 렛시는 다음주 목요일이나 되어서야 조합에 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날 저녁 내내 시무룩하게 소책자만 뒤적였다.

 

그동안 계속 내게 부담스럽게 달라붙어있던 메이는, 조잘거리다가 문득 내 반팔 셔츠의 소매를 들어올렸다. 나의 인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질겁하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비카. 그렇게 저주 거는 법이 배우고 싶어?

 

메이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생각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메이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너가? 넌...마녀도 아니잖아.

 

나는 어쩐지 떳떳치못한 대화를 나누는 기분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메이의 목소리도 덩달아 낮아졌다.

 

고모 방에서 봤어. 

뭘.

책. <저주의 이론과 실제>.

....

원한다면, 몰래 훔쳐다 줄게. 고모는 요새 저주같은 덴 관심도 없으니까 절대 모를 거야.

 

메이가 소근거렸다. 그의 계획은 일리가 있었다. 미리 책 몇 자를 읽어본다고 해서 그리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속삭였다.

 

좋아. 토요일, 두시, 만남의 광장에서 보자.

그래.

기대된다.

 

메이가 기분 좋은 듯 날 꽉 껴안았다. 나는 책만 건네받을 생각이었는데, 메이는 나랑 하루종일 같이 놀러다니려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집에 가야한다며 일어서기 전까지 계속, 토요일에 어디를 기서 무엇을 하자고 떠들어대며 날 붙잡아댔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요일보단 토요일이 더 빨리 찾아왔다. 나는 만남의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내 쪽으로 크게 손을 흔들고 있는 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카! 

 

메이가 내 쪽으로 숨가쁘게 뛰어왔다. 그는 새하얀 봄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직은 초봄이라 추워보였다. 

 

안 추워?

괜찮아. 일단 어디 들어가자.

책은?

 

메이는 들고있던 쇼핑백을 흔들어보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우리는 근처의 패스트푸드 가게에 들어가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를 시키고, 책 <저주의 이론과 실제>를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두꺼운 종이로 된 표지가 가볍게 넘어갔다.

 

뭐, 쓸만한 거 있어?

 

메이는 셰이크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물었다. 정작 책을 가져온 건 자신이면서, 저주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나는 긴 머릿글과 주의사항들을 대충 넘기고 직접 저주의 인을 그리는 방법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주 실용적인 책이었다.

 

우와, 여기 다 있어. 이것만 있으면 애 한 명은 충분히 골로 보내겠는걸.

나, 도움 됐어?

완전 도움 됐어.

 

나는 제법 너그러워져서 대꾸했다. 메이는 뭐가 부끄러운지 뺨을 붉히면서 감자튀김을 와구와구 집어먹었다. 나도 셰이크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독서에 집중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이안을 불행에 빠뜨릴 것이다. 감히 나를 따돌리고 바보 취급한 죄로, 그를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목표를 생각하니 조금 유쾌해졌다. 나는 저주의 인 그리기를 여러번 연습하면서 그 날 오후를 보냈다.

 

 

나는 메이와 헤어지고 온 다음날까지 계속 그 일에 열중했다. 방에서 스케치북을 활짝 펼쳐놓고 연필을 놀리고 있었는데, 문득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스케치북을 덮었다.

 

노크의 주인은 이모였다. 이모는 서스럼없이 내 방에 들어오면서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뭐, 그냥....

이제 작가 그만두고 화가 되려고?

수행평가야.

 

나는 퉁명스럽게 둘러대며 스케치북을 서랍에 넣었다. 이모는 킥킥 웃으면서 마음대로 내 침대에 앉았다.

 

보여달라고 안할테니 걱정 마. 안그래도 우리 집안엔 그림 멀쩡하게 그리는 사람이 없어. 

흥. 이모도 마찬가지잖아.

물론이지, 미술 수행평가에서 C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이모는 중얼거리면서 아예 내 베개를 알맞게 옮겨서 드러누웠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내 책상 위가 보이도록 되어있었는데, 이모는 문득 고개를 들어 내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종이 하나를 집었다.

 

어! 너 다음주에 필수이수수업 듣는구나.

 

그건 블린이 써 준 수업이수 확인서로, 아직 도장이 찍혀있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뜨끔해서 은근슬쩍 이모에게서 종이를 빼앗으며 앉았다.

 

이모도 이거 들어봤어?

물론. 나도 얼마나 분노에 찬 꼬맹이였는데.

그럼 이모도 저주를 걸 수 있단 말이야?

당연하지.

근데 왜 맨날 부장님인지를 욕하기만 하고 저주를 걸지는 않아?

요게. 저주를 건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이모가 내 손등을 찰싹, 때렸다. 나는 입술을 내밀고 손등을 문질렀다. 

 

횟수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도 이 기회에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나는 마녀 일생을 통틀어서 저주를 딱 한 번 걸어봤어. 대부분 그래. 

왜 그러는데?

단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이모가 진지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모가 진지한 얼굴을 하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걸 알았다. 그건 딱 두가지 경우 뿐이었다. 저주에 대해 말할 때, 그리고 이모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몇년 전 사라져버린 이모부의 사정이 이모의 저주 이야기와 관련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렇다면 정말 저주는 인생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답 없는 꼴통을 인생에서 치워버리는 일이라면, 특별히 남발해선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좋은 일을 벌이는 데도 신중해야하는 걸까? 나는 궁금했지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모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 수요일, 나는 계속 허공에 저주의 인 그리기를 연습하면서 2층 화장실 문 뒤에 서 있었다. 수요일 이 시간 2층에는 집필자 클럽 애들밖엔 없었다. 언젠가 이안이 들어올 것이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마음이 차분해졌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거만하고, 당당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소리....

 

하지만 첫번째로 문이 열렸을 때, 나타난 건 예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집필자 클럽 회원도 아니었다. 나타난 건 메이였다.

 

메이?

비카.

 

메이가 담담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당황해서 메이를 화장실 문 뒤로 끌어당겼다. 멀리서부터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메이의 입을 틀어막은 채 애써 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여기서 뭐해?!

음믐무....

 

입을 틀어막힌 채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메이를 놔주려던 순간, 갑자기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나는 다시 메이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바깥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벌컥 문이 열렸다. 

 

경첩의 틈으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기다리던 얼굴, 우리의 왕재수, 이안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안의 동태를 살피며 메이에게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메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빠른 걸음을 전혀 늦추지 않은 채로 화장실 첫번째 칸에 들어갔다. 문이 닫힌 후 바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졸졸 오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메이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후, 발소리를 죽여 이안이 있는 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나오자마자 그를 붙잡고 이마에 인을 그려줄 생각이었다.

 

멈출 듯 멈추지 않던 오줌소리가 마침내 멎었다. 나는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안쪽에서 천천히 걸쇠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나면 지나치게 느긋해지기 마련이라지만, 이건, 너무....

 

느려, 하고 생각했을 때, 뒤에서 어떤 힘이 날 잡아당겨 화장실 문 뒤로 끌어당겼다. 내가 그 힘에 붙잡혀 있던 사이, 이안은 손까지 씻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메이가 묵묵히 날 끌어안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이는 얼굴을 붉힌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은 안 돼.

그럼 왜 날 도와줬어?

어쨌든, 안 돼....

 

메이는 그 후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메이의 품에 멍하니 안겨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빚이 있으니 한 번은 봐줄게.

 

나는 겨우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메이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참지 않을 거야.

 

메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내가 말해놓고도 참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메이는 알았을까.

 

내가 무엇을 하면 그에게 처벌이 될지를, 메이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 대답을 알지 못한 채로 시무룩하게 자습실로 돌아왔다. 메이에게 제대로 막히고 나니 조금 자신감이 감소했다.

 

나는 자습시간 내내 교과서는 펴보지도 않고, 빈 노트에 저주의 인을 그려대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했다. 일단은 렛시의 수업을 먼저 들어보자. 안그래도 내일이면 목요일이니까. 초조해하지 말자, 아직 시간은 많다.

 

 

그래서 다음날, 나는 시간 맞춰 나타난 메이와 함께 조합 사무실 안쪽에 붙어있는 교육장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곧 렛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렛시는 블린과 비슷한 나잇대의 마녀로, 멋진 초록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렛시는 우리에게 교안을 나눠주고는 우리가 앉은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눈높이가 서로 비슷해진 탓에 교육이라기보단 조별모임 느낌이 났다.

 

자. 내가 발제문을 한 번 읽을 테니까 이후에 토의주제에 대한 의견을 나눠보자.

 

메이는 곧 교안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 삼각형 구도가 어쩐지 낯설어서 잘 집중할 수 없었다.

 

렛시가 강의를 해주는 게 아니네요.

 

내가 가볍게 덧붙였다. 메이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필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렛시는 그런 질문에 익숙한 것처럼 싱긋 웃고 있었다.

 

우린 교육자가 아니니까. 이건 우리가 마녀로서 최소한의 지향점을 공유하기 위한 단계란다.

내가 마녀로서 영 못쓸 것 같으면요?

 

나는 문득 떠오른, 덜 삼켜진 생선 가시처럼 마음 한구석에 박힌 어떤 질문을 내뱉었다. 렛시가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교안을 촤라락 넘겨 마지막 토의주제 부분을 펼쳤다. 첫번째 토의주제는 이것이었다. 저주가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나요?

 

내가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저주를 남발할 존재라면요? 그래도 내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해요?

물론, 중요하지. 

 

렛시는 천천히 자신의 교안을 덮었다. 내가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렛시의 진지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비카, 뭐가 궁금한 거니?

 

궁금한 건, 이런 거였다. 이모의 의미심장한 조언들을 듣지 않는 한심한 조카로, 별로 놀이에 끼워주고 싶지 않은 친구로, 늘 있으나마나한 글을 쓰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지내면서, 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의심. 

 

내가 대단한 목적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냥 사소한 불만 때문에 마녀가 되고 싶은 거여도 괜찮을까요? 그냥 재수없는 친구를 미워할 뿐이라도, 그래도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아닐까요?

 

마녀란 항상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하나요?

 

그런 생각을 하면, 나의 삶 전체가 어쩐지 우스운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멋지고 대단하고 의미있게 살고 있는데, 나만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렛시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그제야 마구 쏟아놓은 말들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렛시는 '참 잘했어요' 도장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시작이야.

 

렛시는 그렇게 말했다.

 

저주를 걸려면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렛시는 말했다.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면 결국 언젠간 그 저주에 휘말려버린다.

 

휘말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질문한 쪽은 메이였다. 나는 메이가 뭔가를 궁금해하는 걸 처음 봤으므로 조금 신기해했다.

 

불행이 전이되지. 저주의 주체와 객체는 거울쌍같은 것이거든. 예전에 자신의 선생에게 끝없는 후회의 저주를 건 마녀가 있었어. 그는 그 선생이 자신을 괴롭힌 것을 후회하길 바랐지만, 사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그의 사과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지. 영원히 후회하는 자에게 사과를 받을 수는 없는 법이란다. 결국 그 마녀도 영원한 후회의 늪에 빠지고 말았어.

 

렛시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작은 반항심이 남아있었다.

 

그치만 그 마녀가 잘못한 것은 없잖아요. 잘못은 그 선생이 했죠.

물론이지. 이건 단지 우리의 힘을 어떻게 진정 필요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해주는 이야기일 뿐이야.

마녀들은 너무 고민이 많아요.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툴툴거렸다. 렛시가 웃었다. 아마 그는 이 일에 너무 능숙해서, 나 같은 불량학생의 투정 정도는 우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고민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도 있는 법이란다. 그래, 비카는 이미 첫번째 과제를 훌륭하게 완수했으니, 이번엔 메이가 해볼까?

네?

 

되물은 건 나였다. 내가 뭘 완수한 건지 나도 몰랐다.

 

첫번째 과제는 자신의 내면의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보는 거였어. 비카는, 짜잔, 이렇게 했지.

 

렛시가 자신의 노트를 우리 쪽으로 펼쳐보여주었다. 내가 아까 내뱉은 부끄러운 말들이 요약되어 적혀있었다. 나는 다시 얼굴이 빨개져서 렛시의 노트를 밀어냈다. 렛시는 하하 웃었고, 메이는 조용히 입꼬리만 움직여서 미소지었다.

 

메이는 무엇을 원하니? 말해줄 수 있어?

 

렛시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왕 쪽팔린 김에 메이의 욕망을 제대로 들어두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메이는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대꾸했다.

 

꼭 말해야 하나요?

아...말하기 어려우면, 종이를 한 장 줄 테니 오늘 집에 가서 적어봐. 뭔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네.

 

메이는 종이를 받아서 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나는 어쩐지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수업은 그 후 별 문제없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성공적으로 이수 확인서에 도장을 받아냈다. 이제 진짜로 저주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마녀도 아닌 메이도 제 몫의 도장을 받아갔다. 메이는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그런 메이를 슬쩍 건드렸다. 렛시가 나가서 이제 교육장엔 우리 둘뿐이었다.

 

축하해, 마녀도 아니면서 수업 이수부터 했네.

그러게. 

네 내면은 얼마나 비밀스럽길래 그렇게 꽁꽁 감춰? 나는 다 줄줄 불었는데, 억울하게....

궁금하니?

응?

 

메이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

....

궁금하면 알려줄게. 너에겐 알려주고 싶어. 

 

나는 메이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정지했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냐고 물으면, 물론, 궁금했다. 메이는 미소도 잘 짓고 말도 잘 했지만 어쩐지 늘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았다. 미소에는 즐거움이 없었고, 말에는 진심이 없었다. 

 

무색무취의 인간이었다.

 

난 감정이 없어.

 

메이가 가까이에 다가와서 속삭였다. 그는 나에게 보여준 적 없는 반대쪽 팔뚝을 들어보였다. 거기에 인이 하나 그려져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저주의 인이었다.

 

내 어머니가 나에게 저주를 걸었어. 앞으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왜?

모든 잘못된 결정은 감정에서 비롯한다고 믿으셨거든. 하지만 어머니가 진짜로 바랐던 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었어. 스스로의 욕망을 알지 못했던 마녀는 자기가 건 저주에 휘말려서 어딘가로 사라졌어...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몰라. 아마 렛시가 말한대로라면, 날 무감각하게 만든 대가로 영원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겠지.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나는 갑자기 솔직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놀랐다. 나는 메이에겐 진심이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바라는 게 있어. 원하는 게.

너,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니?

아니.

 

메이가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무감정한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메이의 손은 따뜻했다. 꼭 그 때 화장실에서 나를 꼭 끌어당겼던 손처럼.

 

나는, 네가 계속 자기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

그게 너의 특기니까. 나는 못하는 거지만. 

 

메이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는 여전히 가짜같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어떤 진심을 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몽실몽실해져서 메이를 꽉 껴안아주었다. 메이는 여전히 감정이 희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널 막았던 건 그냥 네가 걱정됐기 때문이야. 아직도 그 애를 저주하길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게.

아니야, 필요없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집필자 클럽의 재수없는 녀석들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내가 나누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가 여기에 있었다.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은, 오래오래 메이를 안아주었다.

 

 

성경험 조합이 공식 기구의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소식은 그로부터 몇달 후에 들었다. 나는 평소처럼 자습을 제끼고 조합에 놀러갔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왜요?

원로회의 한심한 작자들이, 이제 아무도 마녀가 되고 싶지 않을 거래.

 

블린이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렛시가 분통을 터뜨렸다.

 

우릴 몰아낼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더니, 별볼일없는 어용 조합을 하나 만들어서는 거기에 사무실을 내주라는 거야. 이게 말이 돼? 이제 이 지역 마녀들은 어쩌라고?

진정해, 렛시. 사무실이 없어도 계속 마녀들을 만날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너무 부당하잖아.

 

렛시가 울상을 지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세상은 원래 부당한 거지만, 어른이 되면 조금 나을 줄 알았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제 이 세상에 성경험 조합이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지막지하게 슬퍼졌다. 이런, 난 원래 내가 억울한 일이 아니면 울지 않는데.

 

비카, 너무 슬퍼하지 마.

원로회 의원들에게 저주라도 걸면 안 돼요?

우리도 이것저것 안 해봤겠니? 한두 명을 괴롭히는 걸론 소용이 없어. 마녀들 조합은 늘 언제든 사라질 수 있을 것처럼 위태위태했지. 북서부에서도 조합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걱정했는데...우리도 비슷한 수순을 밟았구나.

 

책상 위에 원로회가 보낸 통지서가 올려져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그것을 구겨버렸다. 블린이 뒤에서 나를 안아주었다.

 

그래도 우린 계속 싸울 거야. 언젠가는 재건이 되겠지. 그러면 또 사라질 거고...또 다시 세워지겠지. 영원히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지.

 

정작 가장 마음이 아플 블린이 묘하게 침착해서, 나는 더 화내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 소식을 듣고 다른 마녀들도 속속 사무실에 모였고, 그 안에 이모와 메이도 있었다. 이 사무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블린은 공책을 하나 꺼내서 맨 뒷장을 펼쳤다. 그리고 볼펜을 딸각거리면서 웃었다.

 

우리, 이렇게 잔뜩 모일 일이 앞으로 있을지 모르겠으니, 기념으로 방명록 써요. 

 

블린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적고 공책을 넘기자, 마녀들이 차례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내가 거의 마지막이었다. 공책을 받아들자 서른한 개의 이름들이 공책 한 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블린

안렛시

여리사

박메이

.

.

.

 

나는 그 아래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었다. 그러자 총 서른두 개가 되었다.

 

오비카

 

자랑스러운, 마녀의 이름이었다.

 

 

그 날, 성경험 조합이 다시 한 번 없는 존재로 돌아간 날, 그래서 마치 우리가 그 안에서 보냈던 시간들도 전부 없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던 날, 나와 메이는 통금이 없는 어른들을 뒤로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나는 머리 위에서 번쩍거리는 가게의 간판 불빛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슬프다.

뭐가?

시간이, 흐르는 게....

 

메이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스무살이 되면, 나는 마녀같은 건 전부 잊어버릴 거야.

응.

이런 일에 일일이 마음아파 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나는 다시 간판 불빛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미래에도 여전히 필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건 오늘 만난 서른두 개의 이름들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슬프다기보단 무서운 일이었지만, 오늘만은 슬퍼하기로 했다. 오늘은 슬픈 날이니까. 각자 각자 슬픔을 담고 집에 돌아와,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눈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날이니까.

 

메이가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나보다 키가 한참 큰 후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조용히 애도를 흘려보냈다.

일러스트 l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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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진(국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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