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메히깐 사무라이>

***

에어컨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버스의 내부는 그야말로 생지옥 같았다. 도대체 언제 첫 운행을 시작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이 더러운 고철덩어리는, 조그마한 아스팔트의 균열도 조용히 지나치지 못했으며, 버스가 심하게 꿀렁일 때마다 승객들은 욕설이나 신음을 내뱉었다. 고르도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버스에 탈 적에 창가 쪽 자리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던 고르도였으나 창문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굳게 닫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자리도 마찬가지인지 모든 승객들의 인상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목에는 끈적이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윽고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했다. 고르도는 이곳에서 내려 다음 버스를 타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 몰랐고, 설령 금방 버스가 온다 하더라도 지금 타고 있는 것보다 나은 녀석일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풀썩, 하고 더러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시 뒤 족히 120kg은 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거대한 발을 성큼 성큼 옮겨, 고르도의 옆에 그 거대한 몸을 내려놓았다. 고르도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Puta….!!’

 

 그는 목적지까지의 쾌적한 여행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 밖으로 향했다. 버스는 이제 막 톨게이트를 통과해, 산타 로사 데 리마(Santa Losa de Lima)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접어든 참이었다. 평생을 나야리트(Nayarit)의 시골 마을에서 보낸 고르도에게는 첫 상경인 셈이었다. 상경이라고 해봐야 그 곳이 멕시코시티 끝자락에 위치한 변두리 소도시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힘겹게 얻은 생애 첫 직장으로 향하는 고르도의 마음은 욕설이 난무하는 찜통 속에서도 설레며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차창 밖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풍경은 너무도 광활하고 평화로워서, 간간히 지나치는 속도 제한 표지판이나 가로등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정지화면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평야를 바라보던 고르도의 시야 한 편에 무리 지어 풀을 뜯는 말들이 들어왔다. 고르도는 말들의 생김새로 그 혈통과 쓰임새를 유추해 보다가, 이내 어지러워져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곧 도착하게 될 도시의 풍경과, 자기가 관리하게 될 말의 성격에 대하여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

 

 산타 로사 데 리마에 도착할 때까지 네 시간 동안 고르도는 땀에 절은 채로 자다 깨는 것을 반복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노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막상 그를 데리러 온 사람들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는 조금의 실망을 느꼈다. 비틀비틀 가방을 챙겨 버스에서 내린 그는 가장 먼저 시원한 물 한 병을 사 마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키고는 목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걸은 끝에 그는 목장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르도는 입구에 달린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석양의 목장을 배경으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피부가 그을려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낯설지만 친숙한 그 메히깐은 장치를 조작해 입구를 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르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아미고. 내 이름은 산토스 이냐리투. 그쪽은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안녕하세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나를 따라와. 서둘러 가면 저녁 식사에는 늦지 않겠군.”

 

산토스는 스물아홉으로, 고르도보다 8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도로 위를 걸어 직원들이 다 함께 밥을 먹는 식당으로 향했다. 도로의 오른 편으로는 주차장이, 왼 편으로는 말과 소들을 풀어놓거나 훈련시킬 목초지가 평행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었다. 목초지 안쪽으로 보이는 마구간은 신축인 듯 깨끗해 보였다. 조금 더 걷자 매표소와 스타디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디움의 크기는 고르도가 상상했던 것 보다는 작았지만, 그렇기에 이곳을 찾는 관객들을 근거리에서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앞으로 그 곳에서는 수 차례의 살육이 펼쳐질 터였다. 고르도는 더운 여름날임에도 한기가 도는 듯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산토스는 그런 고르도를 보고 괜찮냐고 물었고, 고르도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산토스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말없이 걸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직원들의 기숙사와 식당이 있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향기로운 스튜의 냄새가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그들이 커다란 식탁이 있는 연회장에 막 도착했을 때, 앉아서 음식을 먹던 누군가가 냅킨에 손을 닦으며 일어섰다. 꽤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 양 팔을 벌리고 다가와 고르도를 가볍게 껴안았다. 마구간을 관리하러 온 친구 맞죠? 내 이름은 후안이에요. 후안 프랑. 반가워요, 후안. 내 이름은 알레한드로…

 

쾅!

 

둔탁한 굉음이 끼어들어 그들의 대화를 반으로 잘라냈다. 식탁의 반대쪽 끝에서 들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중년의 백인이 힘줄이 불거져 나온 손으로 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 쪽에서는 보이지 않을 눈으로 두 멕시칸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다들 영어를 쓰라고 얘기했을 텐데.”

 

굉음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잠자코 있던 후안이 너스레를 떨며 고르도와 산토스를 빈자리로 안내했다. 과장된 동작은 전의 그것과 비슷했으나 그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후안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이제 모든 소리가 돌아왔다. 백인을 포함한 모두가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고르도는 혼란스러웠으나, 달리 자리에 앉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 백인의 낯빛을 살피고자 목의 각도를 조정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고르도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스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백인이 말했다.

 

“이름은?”
“알레한드로… 아니, 알레잔드로 곤자레즈입니다.”
“너무 길군, 젠장. 별명 같은 건 없었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불룩 나온 배 때문에 ‘고르도’(gordo)라고 불리었다. 친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님 또한 그를 고르도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그것은, 기분이 나쁜 별명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이명 같은 것이었다. 그는 ‘고르도는 영어가 아니지 않나’, 하고 잠시 고민했으나 그냥 말해보기로 결심하였다.

 

“고르도요”
“고오오르도오오..”

 

백인은 맛을 음미하듯, O와 R 발음을 과장해 혀를 굴리면서 눈을 감았다. 마치 그의 이명을 방금 받아서 삼켜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스테이크를 썰며 말을 이어나갔다.

 

“좋아, 고르도. 나는 도날드다. 이 스타디움과 목장의 주인이지. 나는 내 말에 거역하는 놈을 매우 싫어한다. 내 말만 잘 들으면서 일을 똑바로 해 준다면 아주 편하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야.”
“네, 도날드.”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모든 소는 내가 직접 관리한다. 만일 소에게 손을 대는 놈이 있다면, 절대 좋게 끝나지 못할 꺼다.”
“네, 도날드.”

 

대화가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가 계속되었다. 고르도는 그의 몫으로 놓인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도날드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산토스를 바라보며, 이곳의 규칙을 똑바로 가르쳐 놓으라고 명령하고는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이 건물에 살지 않아. 저 쪽에 혼자 사는 집이 따로 있거든.”

 

  산토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고르도에게 말했다.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 일단 방부터 보여줄게. 가보자. 고르도는 그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

 

  그가 머물 방은 생각보다 정갈했다. 커튼이 달린 창으로는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식은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개의 침대가 안쪽의 모서리를 각각 차지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중고로 들여온 것임이 분명해 보일만큼 낡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 바른 깨끗한 벽지와 훌륭한 대조를 이뤘다. 한 쪽에는 기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TV도 있었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본 고르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한쪽 침대에 앉아 있던 룸메이트 산토스가 입을 열었다.

 

“여긴 총 12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지. 도날드를 빼고 말야. 그는 직원이 아니라 이곳의 소유주야.”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나요?”
“너랑 나는 말을 관리해. 말은 두 마리뿐이지만. 그리고 경비원이 세 명, 요리사가 한 명. 그리고 나머지 여섯 명은 투우사야. 청소랑 시설 관리는 우리가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어. 경기 전에 소가 들어오면 그 소는 도날드가 관리하고 있고.”

 

  고르도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토스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우린 같은 일을 하게 될 테니, 잘 해보자고. 고르도는 그 손을 잡아 흔들었다. 고마워요. 오늘은 피곤할 테니 짐을 정리하고 바로 자도록 해. 내일 아침에 같이 마구간으로 가 보자고. 산토스는 고르도에게 씻는 곳과 수건이 있는 곳을 설명해 주고는 세수를 하러 떠났다.

  고르도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큰 배낭을 풀어 짐을 정리했다. 캐비닛에 옷들을 걸고, 서랍에 속옷을 잘 개어놨으며 도검이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캐비닛 깊숙한 곳에 세워 두었다. 정말 긴 하루였다. 고르도는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은 뒤 아침부터의 일정을 되짚었다. 물론 그는 집을 나서 버스를 탔을 때를 떠올리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고르도와 산토스는 마구간을 찾았다. 마구간은 네 칸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말은 두 마리 뿐이었다. 고르도가 물었다. 외양간은 어디 있어요? 여기와 정 반대에 있지. 산토스가 들어 올린 손가락은 목초지의 다른 쪽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로소 고르도의 시야에 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마리 모두 경종마 루시타노 종이였다. 갈색 털은 깨끗하고 윤기가 흘렀으며, 눈은 총명했고 코는 알맞게 젖어 있었다.

 

“이 친구 꽤 비쌌겠는데요? 이름이 뭐에요?”
“메를린이야. 그 이름만큼은 너도 아마 잘 알고 있겠지. 그 옆에 있는 녀석은 제시. 둘은 남매야. 사장이 신경써서 골라온 것 같아. 비싸게 주고 샀겠지.”

 

  메를린은 전설적인 투우마의 이름이다. 마주나 조련사들이라면 모를 수 없다. 생각보다 도날드는 투우 자체에 관심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메를린과 제시는 훌륭한 말들이었다. 그들을 사려면 분명 고르도네 가족이 나야리트에서 기르던 말들을 전부 가져와야 했을 것이다.

  두 말과 두 사람은 함께 탁 트인 개활지로 걸어 나갔다. 산토스는 메를린을, 고르도는 제시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말들은 온순했다. 넷은 순조롭게 울타리를 따라 목초지를 한 바퀴 돌았다. 제시는 고르도가 주는 당근을 잘 받아먹었다. 그들은 두 말을 마구간 앞에 묶어 놓고 사육방을 청소했다. 고르도는 몇 분 전부터 그의 머릿속을 헤집던 질문을 밖으로 꺼내 놓았다.

 

“산토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할 일은 이것뿐이에요?”
“왜, 별로 일이 없는 것 같나?”
“아직요. 시설도 다 새 거고, 말도 두 마리 밖에 없으니까요.”
“조만간 경기가 끝나고 나면 알게 될 거야”

 

산토스가 제시의 엉덩이에 난 흉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토요일이 되자, 산타 로사 데 리마 투우장은 아침부터 찾아온 관객들로 붐볐다. 주차장에는 자리가 부족하여 목장 바깥까지 차들이 늘어섰다. 혼자 온 사람, 커플, 부부와 어린 아이들까지, 관객의 종류는 다양했다. 마침내 입장이 시작되었다. 고르도는 착실히 안전요원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관객석은 금방 들어찼고, 곧 경기가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고르도는 서쪽 문에 위치한 격문 안쪽으로 합류하여 마지막으로 말의 상태를 살폈다.

  도날드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카우보이 모자를 한번 매만지고는 격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네 명의 투우사들이 그를 따라 걸어 나갔고 마지막으로 메를린과 제시,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피카도르 역할의 투우사들이 스타디움 가운데를 향했다. 도날드는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투우사를 한명한명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격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소가 스타디움 안으로 튀어나왔다.

  관객들은 오랜 기다림이 보상받을 시간이 된 것을 깨닫고 환호성을 질렀다. 거기에 보답하기 위해 마타도르(matador) 역할의 주인공은 최선을 다해 소를 유린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후안 프랑이었다. 붉은 천과 뒷꿈치를 축으로 한 회전, 몇 번의 뒷걸음질만으로 그는 간단하게 소를 흥분시켰다. 투우에 사용되는 소는 시작 전, 24시간동안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강제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다. 후안은 어렵지 않게 그 소에게 남은 조금의 이성을 날려 버렸다.

  이어서 피카도르(picador)가 제시를 타고 등장하였다. 제시는 소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피카도르의 명령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잔 동작이 많았고 근육이 굳어 있었다. 결국 피카도르가 작살을 꽂기 위해 소에게 접근했을 때 제시의 오른쪽 엉덩이가 뿔에 스치고 말았다. 바닥에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소의 등에 작살이 박힐 때보다 더욱 큰 환호성이 일었다. 제시는 통제를 잃기 직전이었지만 피카도르는 간신히 제시를 안전 구역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고르도와 산토스는 그곳으로 뛰어갔다.

  산토스가 재빨리 제시의 머리에 검은 천을 묶어 눈을 가렸다. 고르도는 상처를 살폈다. 분명 스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붉고 거대한 크레바스가 생겨나 있었다.

 

“산토스, 상처가 커요. 어쩌죠?”
“가서 목을 잡아줘. 그리고 잘 봐. 앞으론 너도 해야 할 거야.”

 

산토스는 능숙하게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에는 소독약과 붕대, 바늘과 실과 같은 응급 처치 물품이 들어 있었다. 고르도는 발을 구르며 침을 흘려대는 제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소독이 시작되었는지 제시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고르도가 제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산토스가 상처를 꿰매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를 꽉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봉합이 끝나고 제시가 조금 진정될 무렵, 밖을 살펴보니 경기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미 소의 양쪽 등에는 반데릴레로(banderillero)가 꽂아놓은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고,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소와 가장 빛나는 순간의 후안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후안은 제자리에서 물레타(muleta)를 들고 소와 함께 춤을 추었다. 스타디움의 이곳저곳에 소가 흩뿌린 피가 배어 있었다. 소가 돌진하는 찰나의 순간, 후안은 1m쯤 되는 검을 들어 보이더니 단숨에 소의 목으로 찔러 넣었다. 검 끝은 소의 심장을 꿰뚫었다. 소가 풀썩 쓰러짐과 동시에 거의 모든 관람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땀에 젖은 후안은 동서남북을 향해 배꼽인사를 하고는, 소의 귀를 베어들었다. 그리고 스타디움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며 관객들에게 명예를 과시했다.

푸힝, 하고 제시가 발을 구르며 울었다. 고르도는 현실로 돌아왔다.

 

***

 

  그날 밤, 스타디움의 직원들은 성공적인 투우를 기념하는 회식을 열었다. 요리사는 경기장에서 죽은 소를 능숙하게 분해해 요리했다. 열두 명의 직원과 한 명의 주인은 먹고 또 마셔댔다. 모두가 취한 밤이 깊어갈 무렵, 식당에는 고르도와 산토스, 후안과 도날드만이 남아 있었다. 고르도는 소의 심장을 찾아내는 후안의 마타도르로서의 자질을 여섯 번째로 칭찬했다. 감사 인사를 한 뒤 후안이 혀 꼬인 영어로 물었다.

 

“그런데 고르도, 너 조금 특이하게 생긴 것 같아.”
“......”
“선조 중에서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산토스가 일어나 후안의 어깨를 잡았다.

 

“후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아니요, 뭐 비밀도 아니고. 당신도 여태껏 궁금했을 텐데 그냥 얘기할게요.”

 

산토스는 잠시 고르도를 응시하다가, 잠자코 손을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할까. 음. 사실 제 증조할아버지는 일본인이에요.”

 

후안은 딸꾹질을 하며 이미 풀려버린 눈을 흥미로움으로 빛냈다. 산토스는 묵묵히 이야기꾼을 바라보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날드는 혼자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분은 원래 일본에 살았어요. 스무 살 무렵에 전쟁이 터졌죠. 이름이 뭐더라, 팔라디움? 뭐시기 섬에서 결국 포로로 잡혔어요. 다행히 좀 괜찮은 부대에 잡혔는지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데리고 있다가 미국으로 데려갔대요. 거기서 괜찮은 친구도 만나고 해서 영어도 배우고. 전쟁이 끝났는데, 별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더래요. 아마 고향이 나가사키라서 그랬을 거예요. 하여튼, 그 미군 친구랑 얘기하다가, 자기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 친구가 이렇게 얘기했대요. ‘헤이, 하야시, 렛츠 고 투 멕시코 투게더. 랜드 오브 찬스.’ 사실 증조할아버지한테는 미국에서 쪽바리(Japs)로 사느니 멕시코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테고, 친구가 일자리도 주선해준다 했으니 그만한 기회도 없었을 테고. 그렇게 멕시코에 왔고, 스페인어 가르쳐주는 여자 친구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할아버지를 낳고,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낳고, 어머니는 날 낳았죠. 끝이에요. 우리 엄마는 별로 눈 안 째졌는데, 난 가끔 특이하게 생겼다는 얘기 들으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긴 얘기는 아니었지만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긴 여행을 다녀온 듯 피곤함을 느꼈다. 산토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칼이 너네 증조할아버지가 가지고 온 거였냐?”
“......그거 봤어요?”
“캐비닛 안에 그렇게 크고 검은 게 들어있으면 누구든지 궁금해 할 걸? 만에 하나 샷 건이 튀어나온다면 너한테 더 잘해줘야겠다 싶어서 확인해봤어. 하하!”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칼 말고 샷 건을 가져올 걸 그랬네.”
“내가 뭐 못해주진 않잖아, 아미고! 하여간 이제는 사무라이라고 불러야겠군. 메히깐 사무라이!”

“새애애무라아아이!”

 

멀찍이서 도날드가 A와 R 발음을 있는 대로 굴리며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시가의 연기를 뱉어냈다.

 

“이봐, 고르도. 정말 재미난 이야기를 알고 있군 그래. 남의 말을 이렇게 집중해서 들은 건 참 오랜만이야.”
“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너네 할아버지가 포로로 잡혔다는 섬 이름, 팔라디움이 아니라 펠렐리우 아니던가?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도날드는 시가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것을 깊게 음미하고는 콧구멍으로 천천히 내뿜었다.

 

“거기서 우리 할아버지가 쪽바리한테 당했지.”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미처 고르도가 그 말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도 전에 도날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르도를 향해 튀어 올랐다. 의자가 넘어지고, 고르도와 도날드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안과 산토스가 말릴 틈도 없이, 도날드는 고르도의 위에 올라타 그의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었다.

 

“알겠어? 난 쪽바리가 싫어. 멍청한 멕시칸들도 싫지만, 그 간악한 개새끼들이 제일 싫어. 남을 이길 힘도 없으면서 머저리같은 전쟁을 시작하고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지. 난 우리 할아버지가 쪽바리의 손에 죽은 다음에 아버지 홀로 얼마나 엿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 매일같이 들어왔어. 그 염병할 핵폭탄을 더 일찍 떨어뜨렸어야 했는데. 네 염병할 할애비가 그 섬에 도착하기 전에 말이야!”
“도날드, 제발 그만 둬요! 고르도는 잘못이 없다고요!”

 

산토스가 달려와 도날드를 떼어놓으려 했다. 고르도는 정신이 없었다. 그의 귀를 꿰뚫은 악의에 가득 찬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당장 헤아릴 수 없었다. 단지 상황이 매우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일본인 외증조할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날드는 멱살을 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자리로 돌아가서, 바닥에 떨어진 채 명멸하는 시가를 주워 물었다. 그리고는 한바탕 웃어 재꼈다. 허리가 바깥쪽으로 크게 휘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일만큼 격렬한 웃음이었다. 후안은 놀라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도날드를 바라보았고, 고르도와 그를 부축하던 산토스도 얼어붙은 채 도날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하하! 고르도! 장난이야, 장난! 뭐 이런 옛날 일로 자네를 해고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시게. 적당히들 하고 들어가 자도록 해. 먼저 간다!”

 

도날드는 식당의 문을 나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겨진 세 사람은 동상처럼 오래도록 그곳에 붙박여 있었다.

  산토스는 고르도를 침대에 눕혔다. 술기운과, 넘어질 때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격통이 그의 몸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음에도 고르도는 도날드에게, 뭐라도 좋으니 사과의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리고 도대체 무어라고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

 

  고르도는 그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매일 밤 꿈 속, 그는 경험한 적 없는 전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의 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죽어가는 그를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에워쌌다. 젖은 채로 눈을 뜨면 새벽이었다. 그 때부터 아침까지는 잠들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고르도는 나흘이 지난 후 도날드가 사는 거처의 문을 두드렸다. 도날드에게 사과하면 이 저주받은 나날들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도날드가 문을 열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와.”

 

그는 고르도를 거실의 소파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커다란 벽걸이 TV와 최고급 오디오 플레이어가 갖추어져 있었다. 한쪽 벽에는 각종 술이 빼곡히 들어찬 장식장이 있었고, 투우의 한 장면을 생동감 넘치는 필채로 그려낸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중 무엇 하나도 고르도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도날드는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고르도는 거절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저...... 도날드. 당신 할아버지의 일은 정말 유감스러워요. 제가 너무 경솔하게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건가?”

 

도날드는 건너편 소파에 가볍게 앉으며 풋, 하고 웃었다.

 

“고르도, 그 이야기를 내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또 내가 용서해도, 과거에 우리의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일 자체는 변함이 없어. 네 증조할아버지나 그 쪽바리 친구 중 한 명이 우리 할아버지를 죽인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고르도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 증조할아버지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날드는 다리를 꼰 채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우리가 아주 중요한 문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구먼. 펠렐리우의 조상들을 대신해서 말이야.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지. 안 그래?”
“......”
“이제 됐네. 나는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겠어. 다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텐가?”
“말씀해보세요.”
“우리 스타디움을 위한 일이지. 세상에 ‘진실의 순간‘에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스타디움은 널리고 널렸어. 아니, 모든 스타디움이 레이피어를 쓴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이 때 일본도를 사용한다면 어떨까? 아마 더 많은 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고르도의 이성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더욱 온전치 못한 제안에는 반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도는 찌르는 데에 적합하지 않아요. 그리고 너무 무거워서 마타도르가 힘들어 할 거예요.”
“칼을 잘 갈아서 후안에게 연습시키도록 하지. 너도 알 테지만 후안은 우수한 마타도르야. 그리고 허리에 칼집을 묶어 놓으면 무게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아. 아마 칼집에서 칼을 뽑아드는 순간 관객들도 넋을 잃게 될 거야.”

 

  이제 고르도는 이 미친 남자를 설득할 논리도, 여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말했다.

 

“검을 빌려드리면 되는 건가요?”

 

***

 

  도날드는 광고 전단에 “사무라이의 싸움”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후안은 갈고리에 소고기를 걸어놓고 일본도를 찔러 넣는 연습을 하루에 몇 백번씩 반복해야 했다. 그는 도날드가 정신이 나간 작자라면서 욕했지만 보수를 상당히 더 지급받기로 했는지 순순히 변화에 응했다.

  그러나 고르도는 여전히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제 그는 더욱 다양한 것을 경험했다. 꿈에서 그는 팔이 잘린 사람이거나 눈에 포탄이 박힌 사람이거나 배가 찢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잘린 신체를 들고, 혹은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배를 안고 울창한 정글을 뛰고 또 뛰었다.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의 소리는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불렀던 노래의 리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깨어 있을 때 환청이 시작되었다. 홀로 죽어가는 자의 중얼거림이었다. 분명 쪽바리에게 당한 미스터 도날드의 목소리일 거야. 고르도가 밥을 먹으며 중얼거렸다.

  사흘이 지나고 투우 경기가 열리는 날이 돌아왔다. 지난 주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스타디움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기꺼이 돈을 주고 일본도를 사용한 투우를 관람하고자 했다. 투우는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후안은 늘 그랬듯 미친 소를 잘 요리해냈다. 피카도르가 메를린을 타고 등장했다. 사건은 그 때 벌어졌다. 후안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소는 느닷없이 붉은 천 너머에 있는 메를린과 피카도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직 그들은 격문을 통과한지 얼마 안 되어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메를린은 소의 갑작스런 돌진에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소의 단단한 두 뿔이 메를린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소는 방향을 돌려 메를린을 스타디움 가운데 방향으로 쓰러뜨렸다. 피카도르는 메를린과 함께 쓰러지며 말의 몸뚱어리에 왼쪽 다리가 깔리고 말았다.

 

“뭐해! 뛰어!”

 

  산토스가 외쳤다. 멍청히 서있던 고르도는 정신이 번쩍 들어 산토스를 따라 내달렸다. 소는 메를린을 바닥에 짓누르고 있었고, 피카도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은 피카도르를 잡아당겨 깔린 왼쪽 다리를 꺼냈다. 발목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피카도르가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도 소는 아직 메를린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산토스와 고르도는 그대로 피카도르를 질질 끌고 스타디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소는 메를린의 옆구리에서 고개를 빼내어 배에 박아 넣었다. 관객들은 끔찍한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소는 역동적인 공격으로 말의 부드러운 배때기를 몇 번이나 찢어 놓았다. 쇠뿔은 아래에서 위를 향하기도 했고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기도 했다. 흙으로 피가 쏟아졌고 쇠뿔에는 창자가 걸려 있었다. 소의 엉덩이가 보이는 쪽에서 관람하던 사람들은 시원스레 까발려진 말의 시뻘건 뱃속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몇몇 투우사들이 소의 머리에 걸기 위해 올가미 밧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한 밧줄은 없었다. 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코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소는 대못을 박듯 배 깊숙이 뿔을 찔러 넣더니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말은 본래의 곧추선 자세를 되찾았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말은 공중에서 몇 번 몸부림쳤다. 배에 걸린 내장이 땅에 이리저리 끌리고 있었다. 소는 무거운 짐승을 오래 들고 있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내렸고, 드디어 해방된 말은 공포에 빠져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메를린은 스타디움의 가장자리를 따라 뛰었다. 대롱거리던 내장이 자기 뒷발굽에 밟혀 찢어졌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뛰고 또 뛰었다. 쇠뿔에 의해 조각난 장기들이 이따금씩 철퍽 소리를 내며 배에서 흙바닥으로 떨어졌고, 열린 배에서는 마치 분무기처럼 피가 흩뿌려졌다. 그가 지나간 길에는 붉은 선이 생겨났다.

  고르도는 토하고 싶었지만 질주하는 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광경은 꿈에서 봐왔고 겪어왔던 그대로의 것이었다. 펠렐리우에서, 이오지마에서, 오키나와의 정글에서 쪽바리의 칼에 배가 찢어진 미스터 도날드. 도날드네 할아버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일본 황군이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고르도 자신이었다. 메를린은 예정된 파멸로 달려가는 병사의 눈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메를린만 빼고는. 고르도의 눈에 끈적한 눈물이 차올랐다.

  한 바퀴를 거의 다 돌 무렵 메를린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걷는 법을 잊은 것처럼 걷다가 스타디움의 벽에 몇 번 부딪히더니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네 발을 경련하는 말의 배는 붉은 동굴처럼 그저 비어 있었다. 모두들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소는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발굽으로 흙을 쓸고 있었다. 그 장면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관객들은 벌렁 드러누운 말을 보고 있었다. 산토스와 고르도는 쓰러진 말에게 뛰어갔다. 말의 다리는 무섭도록 떨렸다. 호흡은 불규칙적이었고 그가 누운 땅이 붉게 변해갔다. 산토스는 소를 살피며 말했다.

 

“일단 여길 벗어나야 해. 경기도 계속 진행해야 하고.”
“그럼 메를린은요?”
“투우가 끝나는 대로 지게차를 가져오자.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 친구는 곧 죽을 거야.”

 

  다음 투우에 등장할 예정이었던 피카도르가 제시를 타고 스타디움으로 나왔다. 그는 능숙하게 소의 등에 작살을 꽂아 넣었다. 산토스와 고르도는 격문 안에서 이어지는 싸움을 지켜보았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도 관객들은 평정심을 되찾고 있었다. 피카도르의 차례가 끝나고 반데릴레로가 소를 상대했다. 격문으로 들어가는 제시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메를린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제시는 얌전히 격문 안으로 향했다.

  진실의 시간이 다가왔다. 관객들의 흥미는 이제 일본도를 든 후안에게 쏠렸다. 이 승부가 오늘 투우의 원래 목적이었다는 것을 관객들은 기억해냈다. 이미 소의 등에는 작살과 깃발이 많이 꽂혀 있었다. 후안은 물레타를 이용해 피 흘리는 소를 완전히 지치게 만들었다. 바로 그 때, 모두가 기다리던 그 파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소를 앞에 두고 물레타를 멀리 던져 버렸다. 관객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다리를 조금 벌리고 서서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뽑아서 소와 마주했다. 이제 스타디움은 관객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도날드도 평소와는 다르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서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스타디움의 풍경은 이제껏 그가 상상해왔던 바로 그것이었다.

  소가 돌진을 시작했다. 후안은 연습했던 대로 검을 한번 높게 치켜들고는, 소의 목을 노리며 칼을 뻗었다. 그러나 소가 머리의 궤적을 돌리면서 후안의 일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소는 추진력과 고갯짓으로 후안을 머리 뒤로 넘겨 버렸다. 교통사고와도 같은 충돌이었다. 일본도는 후안 근처에 떨어졌고,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뒤척거렸으나 일어나지 못했다. 산토스와 고르도는 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산토스가 후안을 부축하여 스타디움 가장자리 쪽으로 도망치는 사이 고르도는 땅에 떨어진 검을 쥐었다.

  산토스는 고르도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리를 질렀다. 고르도, 뭐해! 얼른 뛰어와. 위험해!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고르도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는 그 자신과 흑우(黑牛)의 숨소리만이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마타도르가 교체되었다. 관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도날드는 스타디움 안에서 거리를 두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가 돌진했다. 고르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몸을 크게 틀었다. 그리고 그 회전력을 이용하여 소의 등에 칼을 꽂았다.

  고르도의 일격은 소의 척추를 완벽하게 손상시켰다. 고르도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졌고, 소는 달리던 방향으로 구르며 쓰러졌다.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아왔던 그 어떤 투우보다도 긴장감 넘치는 경기였다. 도날드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안심했다. 산토스와 그에게 부축 받던 후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넘어져 있던 고르도는 느닷없이 일어나 소에게로 달리기 시작했다.

  고르도는 소의 등에 꽂힌 칼을 빼내어 소의 목을 내리쳤다. 그는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잘 벼려진 칼이었지만 거대한 소의 목을 단번에 벨 수는 없었다. 검과 손, 흙바닥은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로 흥건했다. 고르도는 일본도를 식칼처럼 썼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울부짖으며 소의 목을 썰고 있었다.

  관객들의 함성이 차츰 잦아들었다. 고르도의 기행은 스타디움의 환희를 단번에 부숴버렸다. 그들은 고르도의 행동에서 정제되지 않은 혐오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미 투우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도날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자신이 큰 모욕을 받은 듯 분노를 느끼며 고르도에게 뛰어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그만둬!”

 

도날드는 단숨에 고르도의 어깨를 잡고 그를 소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산토스가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외쳤다.

 

“고르도, 안돼!”

 

  고르도의 검끝이 큰 궤적을 그렸다. 도날드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의 흰색 셔츠가 붉게 물들었다. 고르도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넘어진 도날드와 손에 쥐어진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도날드”

 

 도날드의 열린 배에서 창자가 비죽 흘러나왔다. 선연한 분홍빛이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어린아이처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 사이로 간간히 말소리가 섞여 나왔지만 스타디움의 사람들 중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 아메리칸 체로키의 언어였다.

 

체로키의 울음소리는 장엄한 국가처럼 고요한 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투우 경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배가 찢어진 말과, 반쯤 잘린 목의 소와,
칼을 쥔 채로 멀뚱히 주저앉은 메히깐 사무라이 모두, 경청을 위해 숨을 죽여 나갔다.

일러스트 l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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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영(국문 14)
장재영(국문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