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문장
아주 긴 시 아주 길어서 아무도 끝을 모르는 시 읽는 중간에 이 시의 끝은 여기야 하고 정해도 틀리지 않은 시 저마다의 끝을 모아 평균을 낸 것이 꼭 진짜 끝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시 가장 멀리 간 손가락이 멈춰선 자리가 끝인 것은 아닌 시 끝을 정할 수는 있어도 끝나지 않는 시 어느 동네에는 시 한 편으로 된 시집이 있다던데
시집은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어도 상관없는 이야기 모든 혹은 어떤 줄의 첫 단어만 읽어도 되는 이야기 7의 배수 쪽을 펼쳐서 가운데만 읽는 이야기 책장 사이에 숨어 조용히 뜯어낸 페이지도 단권의 시집
나는 입안에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이 매끈한 시를 뽑아낸다 마냥 흰 화면을 보고 앉은 화이트칼라 제목으로는 인명 지명 작품명 아무튼 워낙에 불리는 이름을 되는 대로 움켜쥔다 문장은 남의 것을 집어다가 물기만 얼추 짠다 나는 한 문장도 새로 지을 일이 없었다 그쯤 되니 내가 아니라 시가 문장을 쓰는 거라고 할 만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시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짜릿한 데가 없는 시 거리에 굴러다니는 담배 꽁초 같은 시 흔해 빠진 시 쓸모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시 걷는 족족 밟히는 시 징그러운 시 바로 그 지점이 통쾌한 시 이제 이차원에서 몸을 일으키는 시 입맛을 다시는 시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시 날을 세우고 은반 위를 미끄러지는 시 뒤돌아서고도 전진하는 시 제자리에서 나아가는 시 허공으로
내 폐부에는 잔털이 보송보송한 실 뭉치가 있다 손톱 밑에서 혹은 손가락 마디에서 삐져나온 가닥을 힘없이 당길 때마다 실 뭉치가 끌려 올라갔다가 턱, 가슴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실 뭉치는 구름처럼 고여서 몇 해째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고 하지만 2년에 한 번 받는 건강검진에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흉부를 촬영해도 실오라기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