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눈빛이 참 슬프다.’ ‘너는 웃을 때 엄청 해맑다. 너는 그걸 모르겠지만.’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멍청하게 생겼다거나, 무섭게 생겼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어도. 외모에 대한 뿌리 깊은 콤플렉스에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있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은 네가 처음이었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가 왜 귀를 잘라내었는지, 다자이 오사무가 왜 자살했는지,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도 쉽게 판단하고 정의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지난 25년 동안 거울 속에서 찾지 못했던 내 눈빛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 주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당신을 통해 배웠고, 그것으로 이미 나는 충분히 구원받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쉽게 씌어진 소설이 주제에 맞지 않게 상을 탄 것 같아 부끄럽다. 다만, 그의 말을 한 번 더 빌려 글을 읽어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가슴이 아픕니다. 이런 아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범규(철학 14)
이범규(철학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