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우리가 왜 무엇인가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돌아올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답은 ‘그러고 싶으니까’ 일 것이다. 여행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혹은 강압에 의해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행은 분명 의지와 바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아마 여행이 직업인 사람들은 여행이 너무 즐거워서 업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 여행을 떠나느냐고 물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임을 재확인 하려는 질문이 아니다. 만약 이 물음이 그토록 사소한 것이라면, 수많은 ‘왜?’를 포함하는 질문들은 사실은 몽땅 같은 질문이 된다. 그러니 여행에 대한 이 물음은 조금 다른 부분을 포착하고자 하는 물음일 것이다. 따라서, 풀어서 다시 묻는다면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기를 바라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 칼럼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대답이 제시되고 있다. 김영하와 가브리엘 마르셀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존재라고 말한다. 헌데 이 대답은 인문학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진화생물학적 대답이다. 인간의 진화 과정은 수렵과 채집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본능을 유전자에 새겨줬고, 문명화된 지금에도 그 본능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랑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본 칼럼의 앞에서 말하는 바에 비하면 이 추측은 너무도 밋밋한 대답이다. 김영하는 집은 상처를 흡수한 물건들이 남아있는 공간, 나를 어떠한 의무로 계속해서 추동하는 공간이지만 호텔은 그것들이 말끔히 세탁된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여행은 떠날 만 한 것이다. 이는 훨씬 소위 ‘인문학적인’ 대답이다. 여행에 대해 어떠한 원인이 아니라 이유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칼럼의 후반부에 기자의 체험과 함께 제시되는 아우라 역시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우라의 체험이란 여행이 그것을 향해 이루어지고 그것에 의해 완성되는, 즉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많은 공감이 됐다. 최근 우연히 아주 가까이에서 해금 독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음악을 듣는 일이 그야말로 ‘리듬, 멜로디, 하모니’를 정확히 전달받는 것이라면, 고음질 음원을 좋은 이어폰으로 듣는 게 낫다. 하지만, 이어폰으로는 활이 현을 스칠 때 음과 함께 음이 아닌 마찰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행의 이유에는, 이처럼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체험이 있다는 것에 동감한다.

우리가 왜 그런 아우라를 갈망하게 될까. 아우라는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복제 불가능한 원본다움이다. 무수한 모사와 가상이 그야말로 넘쳐흐르는 정보화 시대에, 원본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본 칼럼이 갖는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상처가 스며든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탈주해 어떤 진짜를 찾으려 여행을 하는 것일까.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난 다음,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간혹 좋아하는 영화가 끝난 후,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쓸쓸하다거나 연극의 막이 내리고 커튼콜을 지켜보는 일이 참을 수 없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끝나지 않는 콘텐츠란 없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즐거웠던 여행에서 돌아온 후 흉터투성이의 적막한 집을 바라보는 일 역시 비슷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저는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상처들로부터 달아나고, 가상으로부터 벗어나 진짜를 찾는 일임에 동의한다. 허나 이 둘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저는 우리를 여행으로 떠나게 한 이유를 여행의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여행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이 아우라의 체험을 겪은 후 달라지는 것이다. 돌아온 집에서 다시금 더욱 의지적으로 탈주를 꿈꿀지, 아니면 집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낄지는 여행자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호모 비아트로는 단순히 여행을 떠나는 존재가 아니라, 여행으로 스스로를 가꾸어 나가는 존재가 아닐까.

김동준(철학 14)
김동준(철학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