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There are people who see the world differently.
They see things in new ways.
They invent, create, imagine.
We make tools for these kinds of people.
Because while some might see them as the crazy ones, we see genius.
 - 애플(Apple)의 Think different 광고


너무나도 잘 알려진 애플(Apple)의 Think different 광고다.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이 광고를 통해 오늘날의 대중에게 노골적으로 묻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 속해 있는가?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라고 그들의 정신을 헤집는다. 마치 악마의 대변인처럼 “당신 혹시 좀비 아니야? 진정 살아 움직이는 존재 맞아?”라고 사람들의 아픈 곳을 찌른다. 그리고 답한다. 애플이 지금 여기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애플의 본질이며 존재 이유이다. 그래서 애플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미치광이들을 지지한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애플도 그들과 함께 생동하는 존재이다. 애플은 그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그런 광고메시지를 파고들면 그 속에서 “인습적 사고의 질곡”에서 몸부림치는 오늘날의 대중을 만난다. 그들을 담담히 바라보는 잡스를, 애플을 만난다.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기를 갈망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우선 포착한다. 갈망으로 타들어가는 자기감정은 꽁꽁 묶어놓고, 튀지 않게 죽은 듯이 지내는 수많은 대중들이 외치는 신음을 듣는다. 허나, 철사 줄보다 질긴 인습의 거미줄을 찢고 세계를 다르게 보고, 또 다르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저기 한번 보세요, 미치광이들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지만, 말썽꾼들처럼 성가시지만, 네모난 구멍에 둥근 못을 박으려는 어이없는 아이들이지만, 애플은 그들을 지지한답니다. 그들은 인습과 통념에 찌든 사람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그들의 눈은 다른 세계를, 다른 아이디어를, 더 깊은 심연에서 다른 세계의 본질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애플은 그들을 위한 도구를 만들어요. 그들이 움켜쥔 다른 생각과 세계를 더욱 빛나는 새로운 가치로 조립하려는 참된 악마의 대변인들이니까요.

애플 광고에 있어서 잡스는 철저한 악마의 대변인이었다. 그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존재론적 균열의 틈새를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깊은 현대인이 사로잡혀 있는 불안의 한 가닥을 포착하여 거기서 포착하여 훌륭한 언어로 표현했다. 감정을 움직이는 메시지를 완성한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라는 갈망은 “다르게 살고 싶어!”의 또 다른 표현이다. Think different는 정확히 그런 성찰의 본질을 대중들에게 전달했고 소비자들은 감동을 받았다. 감정분출의 절정에서 비로소 이슬처럼 맺히는 절절한 감동 말이다. 이 모든 양상의 밑바닥에 강물처럼 흘러가는 변화를 성찰하려면 “철학적으로 생각하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철학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존재론적 양상을 파악하는 일이다. 존재론적 양상의 균열, 그 틈새에 생긴 심연을 어떻게 성찰하며 거기서 무슨 수로 본질적인 감정과 그를 표현할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성찰과 통찰의 결실을 대중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다. 본래 이 말은 가톨릭에서 시복과 시성을 심의할 때 후보자의 약점을 후벼 파서 여전히 은폐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죄상이나 결점을 파헤치는 악역을 담당한 주교를 일컫는다. 그래서 그들은 본래 천사들이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악역을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신앙의 촉진자(the Promoter of Faith)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시성 후보자에 대해서 아주 거칠고 험한 질문도 마다하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그들의 생각하는 방식은 철학적으로 잘 다듬어져 날카롭고, 건설적이며, 비판적이다. 그런 “생각하기의 방법”에서 그와 같이 거칠고 험하다. 하지만 한마디 언어를 폐부를 찌르는, 그리고 철학적 성찰이 담긴 비수처럼 던진다.

요즘 한국사회는 악마의 대변인인줄 알았던 한 정치인이 천사가 변장한 악역이 아니라 진짜 악마의 자식이 아닌가 하는 의혹 때문에 혼란스러워한다. 그가 과거에 던진 비수같이 날카로운 언어가 모조리 방향을 바꿔 그에게 꼽히고 있다. 대중심리를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이기에 그는 어떤 험난한 일에도 의연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 비가 그치면 곧 청문회가 오겠죠.”라는 선문답까지 던진다. 사실 한국사회에도 참된 악마의 대변인 몇몇은 있으려니 했다. 실제 그런 논객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에겐 벗을 가면이 없었나보다. 시간이 가면 가면이 벗겨지고 천사의 본모습이 나와야 하건만, 진실의 거울 앞에서 벗겨진 것은 살가죽 밖에 없으니 말이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바로 좀비사회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모순어법(oxymoron)이다. 좀비는 이미 죽은 자이며 사회(Society)는 살아서 생동하는 실체이다. 죽은 자가 설치는 사회가 참된 사회일 리가 없다. 좀비지옥이란 말이 어울리려나? 한국사회가 완전한 좀비사회가 되기 전에 죽음으로 가는 병에 걸린 한국인들을 깨울 참된 악마의 대변인이 없는가? 그래서 소리 높여 묻고 싶다. “참된 악마의 대변인 어디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