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채연 (cypark4306@skkuw.com)

얼마 전, 동네에 새로 생긴 쇼핑센터에 놀러 갔다.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키즈카페를 보게 됐다. 흠잡을 곳 없이 쾌적하고 좋아 보였던 그 키즈카페의 문제점은 딱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입장료 1만 8000원’. 8000 원도 아니고 1만 8000원이라니. 올해 최저임금은 8350원이다. 두 시간 열심히 일해도 아이 한 명조차 키즈카페에 못 들여보내는 현실을 자각하니 약간 씁쓸해졌다.

윤이형 작가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에서 주인공 희은은 부모가 되는 일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다’. 우주선을 발사시킬 때 0.000001그램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듯, 아이를 낳기로 결정할 때에도 양육에 꼭 필요한 산술적 계산을 냉철히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는 ‘부모의 세계라는 우주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니 모두 함께 가자는, 승무원이 되면 혜택을 주겠다는 모객광고를 조잡한 팸플릿에 수없이 뿌려대는’ 존재이다. 출산장려정책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혜택은 다양하다. 출산장려품, 출산장려금, 육아휴직금, 출산휴가급여, 아동수당, 양육수당, 자녀장려금, 다자녀 세대 아파트 특별 공급 등등... 하지만 다섯 살쯤 먹은 아이가 자신도 다른 친구들처럼 키즈카페에서 놀고 싶다고 말할 때, 국가는 더 이상 그 아이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2만 원에 가까운 키즈카페 입장료를 내주고, ‘보통’ 아이들이라면 모두 다닌다는 학원의 학원비를 지불하고, 남들 다 입는다는 유명 브랜드의 옷을 사주는 것은 조잡한 팸플릿을 날리던 ‘국가’가 아닌 아이의 부모다.

축복 같은 아이인 초록을 키우기 위해 소설의 주인공 희은과 정민은 커리어를 하나둘씩 포기하게 된다. 차근차근 교직과정을 이수했지만 졸업 후 임용고사에 계속 떨어진 정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시작한다. 번역가였던 희은은 육아와 병행할 수 있으며 제법 액수가 되는 일을 찾다가 콜센터의 텔레마케터가 된다. 부부에게는 직업이 주는 사회적 인정보다 초록을 키울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희은이 참여하게 되는 획기적인 실험이 등장한다. 스물네 시간 동안 여덟 명의 사람이 돌아가며 각자 세 시간씩 3개월 된 아기를 돌보는 실험이다. 그 중 두 사람은 아기의 부모로, 그들 역시 담당 시간에만 육아를 하고 돌아간다. 실험 설계자는 이 시스템을 사회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어떠냐고 묻지만, 참가자들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애착 형성이 충분하지 않아 아이 성격이 나빠진다”는 근거를 들어 반대한다. 왜 사회는 ‘애착 형성’이나 ‘아이를 위해’라는 근거만으로 부모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주지 않는가. 아이가 24시간 내내 엄마와 아빠랑 시간을 보낸다고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현란한 출산장려 팸플릿을 날리는 국가와, 매일같이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임을 보도하며 미래를 위해 아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회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약간의 ‘장려금’과 확실하지 않은 ‘주거대책’같은 피상적인 정책만으로는 부모의 짐을 덜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채연 부편집장cypark4306@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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