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금용 나전칠기장, '상품'아닌 '작품' 만들어요
배금용 나전칠기장, '상품'아닌 '작품' 만들어요
  • 신예승
  • 승인 2019.09.24 16:56
  • 호수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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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금용 나전칠기장.
배금용 나전칠기장.

 

우연한 기회에 접해 최고의 기술자로 거듭나
제대로 배우기 위해선 끈기와 재능 필요해

까맣게 물든 옻칠 위 반짝이는 자개 문양. 한국의 미가 그득한 전통공예 중 하나인 나전칠기는 할머니 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우리에게 멀고도 가까운 공예품이다. 가장 늦은 계절인 겨울에 제일 먼저 피는 매화꽃처럼 늦게 이름을 알린다는 뜻을 가진 ‘만정공방’에서 끊어진 고려나전의 맥을 잇고 있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 배금용 나전칠기장을 만났다.

까맣게 물든 옻칠 위 반짝이는 자개 문양. 한국의 미가 그득한 전통공예 중 하나인 나전칠기는 할머니 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우리에게 멀고도 가까운 공예품이다. 가장 늦은 계절인 겨울에 제일 먼저 피는 매화꽃처럼 늦게 이름을 알린다는 뜻을 가진 ‘만정공방’에서 끊어진 고려나전의 맥을 잇고 있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 배금용 나전칠기장을 만났다.

어떻게 나전칠기를 접하게 됐는가.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졌어요. 할머니와 어머니가 보육원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저를 보육원에 보냈죠.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보육원에서 지내다 가족 생각도 나고 고향이 그리워져 탈출했어요. 6.25 전쟁 후 전쟁고아도 많고 나라 사정이 어려울 때라 말 그대로 거지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삼촌을 만나서 서울의 삼촌 댁에서 지내게 됐어요.

삼촌 댁 바로 뒷집이 나전칠기 공방이었는데, 마루 하나에 방이 두 개 딸린 작은 초가집이었죠. 낮에는 작업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곳이었어요. 그 공방을 운영하던 최순식 선생님께서 저에게 공방에서 지내며 기술을 배우라고 하셔서 나전칠기를 처음 접하게 됐어요. 우연히 시작했지만 수목장이셨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재능이 있었죠.

나전칠기 기술을 익히게 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11살 때부터 공방에서 지냈는데 처음엔 물 기르고 장작 때는 일만 했어요. 꼭두새벽에 일어나 잡일을 해야 했지만 월급은 커녕 배곯지 않는 것에 만족해야 했어요. 힘들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버틸 수밖에 없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학벌도, 돈도 없으니 최고의 기술자가 되는 길뿐이다’고 생각했기에 밤잠을 줄여가며 낮에 몰래 훔쳐본 기술을 연마했죠. 기술을 안 가르쳐줬거든요. 그러다 4~5년쯤 뒤엔 재능을 인정받아 제대로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배울 때는 기술 익히기도 바빠 힘든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최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군대에 갔어요. 나전칠기가 지겨워서 그만두려고요. 그런데 직업이 목수라고 했더니 김해 공병학교로 보내져 그곳에서도 3년 내내 목공 일만 했어요. 주위에 목재가 많다 보니 나전칠기를 만들기도 했죠. 도피성으로 간 군대였지만 나전칠기와의 인연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이왕 배운 기술이니 그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버틸 수 있던 힘이었던 것 같아요.
전역한 후에는 최 선생님의 친우였던 민종태 선생님 댁으로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옻칠을 배우기 시작했죠. 시기적으로도 1970년대에 나전칠기가 한창 유행하면서 돈도 벌고 기술도 많이 배웠어요.

나전칠기는 어떻게 만드는가.
나전칠기를 만드는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요. 백골, 옷칠, 나전이 그 순서죠. 먼저 목재로 가구를 짜야 하는데, 그렇게 짠 가구의 나무 틀을 ‘백골’이라고 불러요. 그 다음으로는 칠을 해야 해요. 보통은 까맣게 옻으로만 칠하지만, 오래된 느낌을 주기 위해 동물 뼈를 섞어 칠하기도 하죠. 칠이 다 마르면 그 위에 자개를 놓아야 하는데, 많게는 몇 만개의 조각을 일일이 붙여야 하는 고된 작업이에요. 나전장마다 기풍이 다르고 자개로 백골을 다 싸버리면 흔히 아는 검정색 나전칠기가 아닌 붉은색을 띄는 나전칠기가 탄생하기도 하죠.

금속선으로 문양을 넣는 기법인 고려나전기법을 되살렸다.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에는 전부 금속선이 들어가 있어요. 고려시대 나전칠기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것 중 하나가 팔만대장경판을 넣는 경함이에요. 총 9개가 있는데 경함 하나 당 자개 조각이 약 6만 5000개 정도 들어가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함이기에 동자승들이 자개 하나 붙이고 절하고, 하나 붙이고 절하는 식으로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몇 년에 걸쳐 완성했을 거라고 전해져요. 고려나전기법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다 조선 후기에 작은 자개 조각을 수만 번 붙이는 것이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자개 문양이 커지면서 사라졌어요. 그 때부터 탁자나 장롱 같은 일상품이 나오기 시작했죠.

조선 후기에 고려나전기법이 실전(失傳)된 후 현대까지 고려나전기법을 제대로 하는 나전칠기장이 없었어요. 금속선을 넣게 되면 작업 시간이 수십 배로 늘어나서 다들 기피하는 거죠. 팔만대장경판 경함의 경우도 모두 외국으로 유실돼 그 맥이 사라져 버렸어요. 2014년에 국가에서 일본으로부터 경함 하나를 구매했는데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과 함께 그 경함을 복원했죠. 저는 기술은 알지만 학력이 짧아 깊이가 없었어요. 제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아들이 대학원에서 공부해온 덕에 뿌리를 제대로 찾아서 만들 수 있었죠. 경함을 만들던 중에 허리디스크에 걸려 수술을 받았는데, 입원한 중에도 작업을 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어요. 그만큼 애정이 가고 뿌듯한 작품이에요.

현재까지 제작한 작품 수는 몇 점정도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나전칠기만 60년 이상 하다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 전에는 가구를 주로 만들어 팔았는데, 일이 잘 안됐어요. 많은 어려움을 겪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1979년부터 작품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죠. 어림잡아 1만 점 이상의 나전칠기를 만든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단연 경함이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이에요. 그 작품으로 1988년에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하기도 했죠. 꼴찌 상이었지만 대한민국 최고 장인들이 모인 대회에서 상을 타서 신문에 제 이름이 실렸다는 생각에 너무 신이 나서 밥 먹다가도 웃고 자다가도 웃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때 제작한 경함은 엉터리에요. 새겨진 꽃잎이 9개가 돼야 하는데 전 8개로 만들었거든요. 당시 진품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공개를 하지 않아 책을 찾아가며 굉장히 어렵게 만들었어요.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갔었는데 그래서인지 훗날 진품의 복원도 부탁받게 됐습니다.

그 후 대회나 공모전에 꾸준히 출품했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수상을 했어요. 덕분에 명장과 무형문화재에도 등록하게 됐죠. 많은 상을 받았지만 시초가 된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대략 얼마 정도인가.
기약이 없어요. 저는 작품의 모든 과정을 직접 해서 더 오래 걸리죠. 제가 기술을 배우던 1950년대에는 작은 공방 안에서 백골부터 자개까지 모든 작업이 이뤄졌어요. 백골은 목수가, 칠은 칠장이, 자개는 나전장이 담당했는데 다들 자기 몫이 끝나면 다른 일을 찾아 떠났죠. 그런데 공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저는 갈 곳이 없다보니 모든 기술을 두루두루 배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하다 보니 작업 기간이 길어져요. 가장 오래 걸린 작품은 경함인데, 완성하기까지 수년이 걸렸죠.

작품에 금액으로 가치를 매긴다면 어느 정도인가.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경함을 판매한다면 하나에 3억 정도에요. 하지만 다시 제작하기 힘들어서 팔고 싶지 않아요.

저는 만들고 싶은 걸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만드는 게 좋아요. 그래서 판매 목적으로 여러 개 만들진 않아요. 전 돈이랑은 인연이 없어요, 그저 밥 세끼 먹다가 작품 남겨놓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죠. 금전적 가치를 떠나서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굉장히 뿌듯해요. 또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제게 주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전칠기 장인으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에요. 어떨 때는 차비도 없을 정도니까요. 신이 ‘배금용은 일만 하고 저승으로 와라’고 한 것만 같아요. 60년 넘게 이 일을 하는데도 여전히 실수를 한다는 것도 어렵죠. 머릿속에 내일 일할 것을 그려보다 보면 잠이 안와요. 수십 번을 머리에 그려보고 난 뒤에 작업해야 실수가 없어요.

장인이 생각하는 나전칠기의 가치란.
‘아는 만큼 보인다’. 나전칠기를 모르는 사람은 제 작품을 그냥 준다고 해도 안 가져가지만 아는 사람은 보고 감탄해요.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대중화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통문화로 역사에 남을 뿐이죠.

나전칠기문화 전승 활동 중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가.
2005년 수상을 마지막으로 출품은 하지 않고 있어요. 후배들에게도 수상 기회를 줘야죠. 대신 작품 심사를 하거나 방송출연,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편이에요. 품도 많이 들고 대가도 적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전시회도 열고 있어요. 개인전이 있을 때마다 작품집을 제작해서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해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목표가 있는가, 어떤 문화인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경함 9개를 모두 완성하고 싶어요. 선대 나전칠기장들이 못한 것을 해냈다는 것에 굉장히 자부심을 느껴요. ‘만정공방’하면 고려나전, ‘배금용’하면 고려나전 분야에서 최고를 이룬 금속공예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성남시민속공예관에 위치한 만정공방에 배금용 장인의 작품이 전시돼있다.
성남시민속공예관에 위치한 만정공방에 배금용 장인의 작품이 전시돼있다.
고려나전 중 하나인 나전국당초문경함으로 7개의 팔만대장경판이 들어간다.
고려나전 중 하나인 나전국당초문경함으로 7개의 팔만대장경판이 들어간다.
오래된 느낌을 주기 위해 동물 뼈를 옻에 섞어서 칠했다.사진 | 김나래 기자 maywing2008@
오래된 느낌을 주기 위해 동물 뼈를 옻에 섞어서 칠했다.사진 | 김나래 기자 maywing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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