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언제부터인지 학생들에게 “어느 고등학교 나왔니?” 물으면 생소한 답을 듣게 되었다. “저, 일반고 나왔는데요." 출신학교를 자신 있게 말하는 일부 학생들은 특목고나 유명 자사고 졸업생들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필자 같은 고교 평준화 세대 이전의 선배들이 보여준 모습의 데자뷰로 느껴진다. 일부 명문고를 나온 분들은 교명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며, 그 당시 동기들 중 저명인사들을 나열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자신의 고입 실패담과 함께 xx학교 나왔지 뭐 라는 사족을 달곤 했다. 결국 고등학교 입시에 대한 트라우마가 다시 한번 사회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사회적 자의식이 형성된 배경에는 특목고 졸업생들이 우수하다는 사회적 믿음이 깔려 있다. 또한, 이들을 얼마나 유치하는지가 일부 대학에서는 입시의 성패로도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참인 명제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특목고의 교육 과정이 학생들을 차별할 만큼 우수한 인재로 육성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대학입시에서는 특목고의 교육효과보다 조기선발효과에 훨씬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즉, 특목고 교육의 우수성보다는 조기 선발된 대한민국의 일부 학생들이 우수하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후자로 치환된 주장은 명제로서의 진위를 논할 가치도 없는 자명한 동어 반복일 뿐이다.

그러면 일부 특목고의 조기 선발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국 특목고에 안착하든 실패하든 초등학교부터 시작한다는 무제한적 선행학습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재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머리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이른 나이에 3~4년을 앞선 내용을 개념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결국 이에 대한 해법은 반복을 통한 유형학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습에 맞는 나이가 되면 약간의 노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을 3, 4년을 당겨 익히다 보니 낯설음은 공포감으로 자리잡아 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우수한 자연과학도로 선발했다는 학생들도 수학, 물리에 대한 거부감이 커 보인다. 얼마전 2학년 전공수업에서 50여명의 수강생 중 물리 1을 시험 본 학생이 단 1명 밖에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반면, 문제를 많이 풀어 달라는 주문은 증가하고 있다. 대학도 유형학습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70년대 명문고가 명문대 진학을 의미하듯 지금의 특목고도 명문대 합격율의 동치가 되고 말았다. 결국 특목고가 대학입학의 단축키로 작용함으로써 벌어지는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무제한적인 조기 선행학습과 이에 따른 지적 성장 단계의 왜곡, 그리고 거기서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의 사회적 자아 분열 현상이 현 대학 입시의 상황이다. 특목고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이 성공적인 것은 아닌듯 하다. 평균적으로 반 정도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실패한 자는 잊혀진다. 많은 일반고는 학습 분위기를 주도할 학생들을 잃고 교사들도 일부 학생에게 모든 자원을 밀어주는 방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오늘의 대학입시는 출발 시간이 서로 다른 달리기 시합이 되고 말았다. 모두들 대학을 들어오기 전에 지쳐버린다. 초등학교에서 정석을 풀고, 고등학교 때 논문을 쓴다고 해서 한국 과학계와 산업계가 얼마나 발전할지 의문이다. 대학은 아직 지치지 않은 머리로 지적 호기심을 간직한 학생들이 필요하다. 일부 특목고가 대학 입학의 단축키로 작용하는 한 학부모는 투자를 외면할 수 없고, 학생들은 학문을 시작하기 전에 지쳐가고 그 경쟁에서 밀린 어린 친구들의 가슴에는 상처 깊은 자의식만 남고 있다. 특목고를 폐지하자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교육환경의 선택권을 막을 수는 없다. 과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과학고로, 언어에 재능 있는 학생들은 외고에서 교육받으면 될 것이다. 단, 거기까지다. 대학이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학생을 선발할 능력이 있다면 더 이상 고등학교 이름에 기대지 말자. 그 학생의 이름만 불러주면 될 것이다. 필자도 이제는 학생들에게 출신 고등학교를 묻지 않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