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는 모교 성균관과 떼어놓을 수 없다. 언필칭(言必稱) 반만년의 유구한 문화사를 자랑하고, 1만년이상의 유적 유물을 통해 우리 민족사의 증거와 이야기가 전해오는 우리 역사에서 대인(大人), 군자(君子), 주자(子), 동량(棟樑)이 되는 리더를 기르는 학교- 태학, 국자감, 주자감, 성균감, 성균관, 국학, 서원, 요(寮), 재(齋) 등에 대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서경천도(고구려고토회복)를 주장하던 묘청의 난을 진압한 사대-기회주의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고려 인종 23년 AD1145)와 몽고에 항전하던 충선왕5년(1313AD)부터 공민왕11년(1362AD)까지, 이암은 17세 급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일인지하 만인지상 一人之下萬人之上)을 두 번이나 맡으며 나라를 지키다 1363년 2월 강화도로 은퇴했다. 이암은 같은 해 공민왕 13년(1363)10월에 편년체 역사서<단군세기>를 썼으며, 다음해인 1364년 5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암, 향촌선생, 이 두 분 사가는 200년을 떨어져 살았지만, 우리에게 물려준 그 역사적 유산은 서로 달라 하나는 사대(事大), 무사안일로 생존을 부지(扶持)한자요, 다른 한분은 위대한 충의로 격렬하게 이름을 남긴 분이다.

역사기록을 보면 한(고조 유방이 세운/西漢/202BC-8AD)나라가 초패왕을 대신하여 패(覇)자가 되자, 진시황과 유방자신이 태산에 천제를 지냈음으로 그는 이미 <紫氣東來>라는 현판을 보고도 하상주3대 선진문명국인 군자국, 인방(仁方)인 조선을 장성북쪽에 사는 오랑캐(北狄)라 곡칭(曲稱)하며 압박했다. 또한 한(漢)을 중화(中華), 그 외방(外邦)은 속민으로 취급하며 좋은 것은 다 漢이라 하였으니 동아시아의 글자 은의 갑골문을 漢文이라 한 것도 그 때부터이며 그 그릇됨과 패권주의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옛 조선(BC2333-BC194)이전에도 주자(子/庶子部/英才)를 모아 자(紫)부에 선인을 두고 학생을 가르친 자부선인기사가 있었다. 단군세기 BC2240년 제2세 부루단군 조에는 모여든 학생의 거쳐-요(寮)를 설치했었다니 학생, 선생, 배움의 터를 관리하던 학교에 대한 기록이라 하겠거니와 고구려가 진(晉)의 태학제도를 도입한 것이 소수림왕2년임에는 다툼이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대야발의 단기고사(1959년 신채호역)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 이암의 단군세기 등 우리정사(正史)에서 확인된다. 갑골문 인(仁)방 정벌기사, 산해경, 왕인(王人)에 대한 일본 고사기의 화이길사(和邇吉師)와 일본서기 왕인/유승국교수연구 논문 참조)에 대한 인접국가의 역사와 유적, 유물 등으로 고대부터 청구와 조선은 군자국으로 (1)의관정제, (2)용감하게 대검(帶劍)하고 호랑이를 거느리고, (3)호양(互讓)부쟁(不爭)하여 예의(禮義)가 있다했으니 이는 중화의 태학에서 배우는 5상(仁義禮智信)과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당대 최고 국립학교이었던 태학이 성균관으로 거듭난 것은 실로 고려가 몽고의 사위나라로 전락하면서였다. “한 천하(몽골제국)에 두 개의 태학을 둘 수 없다”하여 고려의 국자감(성종2년)과 그 안에 있던 태학을 국학(충렬왕 원년 1275), 성균감(成均監/충선왕 원년, 충렬왕24년 1298), 다시 충렬왕 복위 후, 34년(1308)에 성균관으로 개명하였었다. 그 후, 공민왕(5년 1356)의 반원정책에 따라 국자감으로 회복했다가 동왕 11년(1362)에 성균관으로 되었으며 지금도 그 건물이 개성성균관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성균관대학교의 이름은 몽고의 패권적 압박의 결과이다. 하지만, 한 무제의 재상이던 동중서가 요(堯)전시대에도 대학명칭이 있었을 것이나 문헌이 없어 알 수 없고 오제 때 통틀어 성균이라 하고 예악에 중점을 둔 것 같다고 한 것이 통설이 되었다. 조선 태조(이성계)4년(1395)는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3년 만에 승교방(현 명륜동)에 대성전, 명륜당, 비천당, 존경각, 동서재(기숙사)등 부속건물을 완성한다. 성균관은 명실상부한 국립대학으로서 조선 505년 간 최고 인재양성기관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1월의 홍범14조와 2월의 교육입국조서로 성균관의 전통적 도덕교육, 국민을 위한 체육교육, 그리고 서구의 새 문물 습득에 필요한, 영어, 의술, 기술교육을 통한 덕, 체, 지의 조화를 목표로 새로운 국립교육기관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점강점기를 당하여 민족교육을 금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일치하는 교육제도를 강제함으로서 성균관은 경학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명륜전문으로 전락하였다가 광복과 함께 종합대학 성균관으로 지난 70여년사이에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700여 년간 교육기관으로서 성균관의 전통과 자존의 역사 위에서 세계일류대학과 경쟁하면서 대한민국의 동량들을 인의예지신-오상과 지덕체 삼위일체의 조화, 산학의 공조로 인류문화의 창달에 기여하고, 학생, 교직원, 동문들이 훈연일체 되어 앞으로 나가고 있다. 장하다!

림관헌(법률 56)북미주연합동문회 고문,Goldman Product, Inc. 회장
림관헌(법률 56) 북미주연합동문회 고문, Goldman Product, Inc.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