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연수 기자 (yeonsoohc@skkuw.com)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구별하기 쉽지 않아
궁급적으로 생존이 목표인 기억

인간에게 있어 기억은 정말 소중하다. 인간은 기억을 토대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소중한 기억은 먼 옛날부터 연구 대상이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는 뇌에 대한 연구가 쉽게 이뤄질 수 없었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점차 과학이 발전하면서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베일에 싸여있던 기억의 비밀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데이터 저장고, 기억
기억이란 인간이 경험한 것을 뇌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재구성하는 것이다. 기억은 크게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눠진다. 단기기억은 장기기억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 뇌에 저장됐다가 사라지는 기억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기기억이 *경화과정을 겪으면 장기기억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강민석(심리) 교수는 “모든 단기기억의 정보가 장기기억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며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정보의 부담이 높아 해마가 활성화되는 경우다”고 말했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구별하는 기억의 지속 시간에 대해 강 교수는 “기억의 어떤 현상을 기술함에 있어 어디까지가 단기기억이고 장기기억인지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단기기억은 장기기억과 달리 외부자극에 의해 쉽게 잊히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구별하고 각각의 하위 기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분류하고 있다. 단기기억에는 인지과제를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작업기억이 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이 작업기억의 예시다. 한편, 장기기억은 다시 사실사건기억과 비사실사건기억으로 나눠진다. 사실사건기억은 불변의 진리나 개인적인 사건 등에 대한 기억인 반면 비사실사건기억은 기술, 습관, 행위에 관한 기억이다.
 

기억의 중추, 해마
기억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뇌 부위는 해마다. 해마는 양쪽 측두엽 부분에 한 개씩 존재한다. 해마는 1564년 볼로냐 대학의 의사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란티우스가 뇌를 해부하던 도중 발견됐다. 그러나 발견 당시의 사람들은 해마가 인간의 기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위라는 사실을 몰랐다. 인간의 기억에 있어 해마의 중요성이 드러난 것은 간질 환자였던 헨리 몰레이슨이 치료의 일환으로 해마 제거 수술을 받고 난 이후다.

양쪽 해마 제거 수술을 받은 헨리 몰레이슨의 발작 증세는 일부 장기기억 능력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몇 초에 걸친 단기기억과 수술 전 경험에 대한 기억은 가능했지만 새로운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심리학자들은 해마가 기억의 최종 저장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마는 외부자극으로부터 받아들인 신호를 정리해 일시적으로 저장한 후, 기억이 경화과정을 거쳐 대뇌피질에 고착될 때까지 붙잡고 있다가 측두엽에 해당 기억을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더불어 헨리 몰레이슨이 수술 전 기억은 가지고 있지만 그중 일부인 수술 3년 전부터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음을 통해 심리학자들은 해마가 기억을 붙잡고 있는 기간이 3년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나 헨리 몰레이슨이 모든 장기기억 능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심리학자들이 그에게 거울에 반사된 종이를 보고 별 그리기 연습을 시켰을 때 처음에는 별을 그리지 못했다. 그러나 연습을 할수록 그는 별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이를 통해 보면 비사실사건기억에는 해마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사실사건기억에는 해마가 아닌 ‘줄무늬체’라는 뇌 부위가 관여한다.
 

기억의 형성과 재구성
그렇다면 해마는 기억 형성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여할까. 먼저 외부자극의 신호가 시각세포와 청각세포 등에 있는 뉴런의 축삭돌기에 전해진다. 신호는 축삭돌기를 지나 다음 뉴런의 수상돌기로 간다. 이때 축삭돌기와 수상돌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인 시냅스를 지나는데 이 과정에서는 신호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다음 뉴런으로 전달된다. 신호가 감각계의 뉴런을 거쳐 신경계에 속한 해마 내부에 있는 과립세포에 전해지면 과립세포의 수상돌기에서 전기적 흥분이 발생한다. 이는 경험을 저장하기 위한 Long-Term Potentiation을 유도한다. 이때 Early Long-Term Potentiation(E-LTP)이 발생하면 해마는 단기기억에 관여하고 Late Long-Term Potentiation(L-LTP)이 발생하면 장기기억에 관여한다. 이후 기억이 경화과정을 거치면 해마는 기억을 대뇌피질에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살펴보면 기억 형성에 있어 해마 내부의 *신경 섬유와 대뇌피질 간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헨리 몰레이슨과 같이 해마 자체가 손상되거나 해마와 대뇌피질 간의 연결이 손상된 경우에는 기억상실증과 같은 질병에 걸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장된 기억 조각을 회상하는 것을 기억의 인출이라 한다. 이때의 기억은 장기기억과 단기기억 모두 해당한다. 단기기억은 작업기억과 같이 몇 초만 지속되는 것도 있지만 시험 공부한 내용과 같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의 인출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을 기억의 재구성이라 한다. 기억 인출 과정에서는 기억 형성 과정에서 생겨난 시냅스가 특수단백질분해과정을 통해 허물어진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강봉균 교수에 따르면 이 과정은 기억 재구성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시냅스가 허물어지면 잘못된 기억이 추가돼 왜곡될 수도 있고 어떤 기억은 삭제돼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특정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거나 변형된 기억을 가질 수 있다. 강봉균 교수는 “특수단백질분해과정을 조절하면 특정 기억을 유지시키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해져 의학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의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며 특수단백질분해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억의 중요성
기억의 궁극적인 목표는 생존이다. 생존의 위협이 느껴지면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편도체는 해마와 연결된 부위로 기억과 관련된 감정적인 판단을 한다. 이에 대해 강민석 교수는 “편도체에서 처리하는 정서 정보가 해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해마의 정보 처리를 조절한다”며 편도체와 해마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편도체에서 강렬한 감정의 판단을 내리면 해마에서는 해당 기억을 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해 다른 기억에 비해 잘 저장시키는 것이다. 특히 공포와 관련된 경험은 편도체에서 생존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해마에서는 이를 확실하게 저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끓는 주전자를 만지고 손을 덴 이후로는 주전자를 맨손으로 만지지 않는다. 이는 기억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기억은 미래차원에서도 중요하다. 과거에 기억은 과거를 돌이키기 위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간의 기억을 미래차원으로 연구하면서 기억을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으로도 간주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미래에 어떻게 연결될지 상상해보는 ‘미래기억’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다니엘 섹터 교수는 과거 회상을 담당하는 해마가 미래를 상상하는 기능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해마가 미래기억에도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지워싱턴대 신경과 리처드 레스탁 교수에 따르면 미래기억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미래의 일을 예측하고 이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준다.

*경화과정=유전자 발현과 단백질 합성에 의해 시냅스 구조가 변해 기억이 단단해지는 과정.
*신경 섬유=신경세포의 축삭돌기가 연장된 것.

일러스트 |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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