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사진 l 류현주 기자
사진 l 류현주 기자

 

“약대를 간 것이 저에게는 약점이라고 생각해 소심한 대학 생활을 보냈는데, 지금은 오히려 강점이죠.”
법무법인 화우에서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이희성(약학 71) 동문을 만났다.

부모님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꿈 하나로 역경 이겨내
소극적인 과거 잊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변해


어려웠던 환경 속에서 소박한 꿈을 갖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는 전쟁으로 문화적, 사회적, 환경적 등 모든 측면에서 피폐했다. 이 동문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친구들에게 음식을 자주 얻어먹곤 했다. 이런 생활이 그를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유년 시절의 꿈에 대한 질문에 이 동문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일 때 태어나 당장의 생활에 급급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나 행정 관료와 같은 직책을 맡겠다는 직업적인 차원에서의 꿈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렇지만 어렵게 자식을 교육하신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잘 살아가야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죠.”

소심한 대학 생활을 보내다
이 동문은 대학 지원 당시 시대적으로 중화학 등이 발전하던 산업화 속에서 이과 성향인지, 문과 성향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자 했다. 그는 시험 봐서 들어가는 대전중·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전기 지원 시 서울대 공대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는 떨어졌고, 후기 지원에서 우리 학교 약학과에 붙었다.

대학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은 약학이 그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와서 보니 제가 문과 성향인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약학에 집중을 별로 못했고, 법학관에 가서 법학이나 행정학 등을 공부했죠.” 당시 이 동문은 학교에 뜻이 많지 않아 약학 외에 재정학이나 행정법 등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렇지만 모든 약학 수업이 그에게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중기 교수님의 ‘약물학’이라는 과목에서 교수님께서 ATP 회로를 침묵 속에서 30분 동안 칠판에 그린 후 설명하셨는데, 내용 이해가 수월하도록 해주시는 교수님이 대단해보였고 약물학에 신비함을 느꼈어요. 이 수업을 들으면서 대학교수에 흥미를 느끼게 됐죠.”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그를 더 소심하게 만들었다. 이 동문은 소심했던 대학 생활에 대해 “대부분의 약대 친구들이 약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기 때문에 대학시절에서 경험한 인간관계에서 이해타산적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 대학 생활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가 손에서 아예 약학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 동문은 약사고시 대신 행정고시나 사법고시를 볼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 약대 학장이 약사고시를 봐야 졸업할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약사고시를 준비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공부했던 약학을 기반으로 열심히 공부해 약사고시에 합격해 약사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약사가 되고자 하는 꿈은 없었지만, 나중에 공무직에서 일할 때 약사 증명서가 큰 도움이 돼 그분께 정말 감사하다고 이 동문은 말했다.
 

약학과 행정학의 만남을 꿈으로 펼치며 진취적으로 변하다
이 동문은 학사를 졸업하자마자 ‘한독약품’에 취업했다. 그는 약의 원리를 영업직원한테 알려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한독약품을 나가고 공무원이 되고자 했다. 한독약품보다 월급이 턱없이 모자랐음에도 약학보다는 행정학이 더 좋았던 그는 제약회사원에서 공무원으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갔다.

이 동문이 처음으로 공직 생활을 한 곳은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다. 그는 그곳에서 약의 사용을 허가하는 일을 하면서 약학을 바탕으로 행정이 뒷받침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전했다. 이에 그는 행정학을 더 공부할 수 있는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대학원을 다니게 됐다. 그때는 지난 시간과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존재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됐다. 이 동문은 학생들을 대표해 연설도 하고, 전체 학생의 의견을 교수한테 전달하는 역할도 스스로 나서서 맡았다. 이로써 그는 졸업할 때 연세대가 주는 보건 분야 최고상도 받는 등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으로 많은 결실을 맺었다.

이후 보건사회부의 업무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로 넘어가 이 동문도 선별돼 식약처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타대 약학과 출신들이 식약처를 주름잡고 있을 때, 이 동문은 우리 학교 약학과 출신 최초로 식약처에서 과장부터 국장, 차장, 청장까지의 자리를 차지했다. 약대를 나왔다는 사실을 약점이라고 느낀 그가 이것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자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확실하게 느낀 것은 이때부터였다. “과장부터 청장의 자리까지 제가 맡았던 직책들은 적극적인 리더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서 정말 피눈물 나게 노력했죠.” 덧붙여 그는 “논리적으로 얘기해서 다른 사람들이 수긍한다면 그 사람은 실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꼭 해결하리라는 의지로 오랫동안 고민해야 사람들이 그 사람을 따라요”라고 말했다.

식약처 청장 직책을 맡으면서 중요시한 것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이 동문은 “선 조치, 후 해결”이라는 공식을 강조했다. 고혈압약이나 위장약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되는 등 큰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항상 “선 봉합, 선 판매금지, 선 자재 회수”를 강조한다고 전했다. 식약처가 발암물질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실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이 시간에 고혈압약과 같이 꼭 먹어야 하는 약을 먹는 사람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약을 먹어야 한다. 이 동문은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위 공식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동문이 임기 동안 해낸 가장 큰 업적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원산지가 후쿠시마 현인 농산물, 수산물, 축산물을 모두 판매 금지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지금도 자부심을 많이 느끼죠”라고 말했다.

이 동문은 식약처에서 근무할 당시 우리학교 대학원 생물약학 박사 생활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자과캠이 수원으로 분리돼 그는 율전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박사 과정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정책의 효율적인 방안, 의약품의 품질 개선 방안 등 행정적이고 정책적 측면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또 공무원이나 교수를 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바람이 생각나기도 했고,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은퇴하면 박사 학위 소지자만이 강단에 설 수 있다고 들어서 하게 됐죠.” 그는 식약처 청장 임기를 마친 후 우리 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활약했는데, 이에 대해 이 동문은 “수업 준비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지금은 인생 강의와 같은 특강 정도만 하고 있어요”라고 전했다.
 

법무법인 고문의 길을 걷다
이 동문은 약학 분야에서의 일 이후로 법무법인 고문으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법무법인 고문이 된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동문은 “교수 생활에 지친 와중에 선배님이 법무법인 화우를 창립하셨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하게 됐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지금의 일이 법률적·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방향을 제시한다는 역할이 분명히 가지고 있어 보람차고 고문 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고문은 법률적인 내용만 아는 법률가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직업이다. 한 예시로 어떤 약에서 발암물질이 나왔다면, 법률가는 발암물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수치만 봐서는 얼마큼 유해한지 모를 수도 있다. 이때 고문이 자문하는 것이다. 법률가는 사회적 약자와 법률적 약자의 편이면서 약학 분야에서 비전문가인데, 법률가의 법률 해석을 돕기 위해 전문가가 옆에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된다. 이 동문은 “특히 저는 행정을 해봐서 약학 관련 조언을 하면서도 법률서에서 정확히 어디를 보면 특정 내용이 나와 있다고 말할 수 있죠”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앞으로의 인생계획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던 제가 학교 동문들의 도움 덕분에 학교를 빛내는 존재가 되었어요.” 그는 동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식약처 청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에 대해 애정을 가지면서 조금씩 자주 기부하는 것보다 한 번에 큰 액수를 학교에 기부하고 싶은 꿈을 갖게 됐죠.”
 

성균관대학교 후배들에게 한마디
“수동적인 자세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말고 큰 꿈을 갖고 적극적인 태도로 학교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모든 역경이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이 동문은 복에는 *청복과 *열복의 두 가지 복이 있는데, 열복보다는 청복을 추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복을 추구함으로써 외유내강의 모습을 가진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맑고 깨끗한 행복을 천천히 추구하는 후배들이 되길 바라요.” 이어 그는 자연과학 계통의 학생들은 인문사회과학 계통의 책을 많이 읽고, 인문사회과학 계통의 학생들은 자연과학 계통의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한 쪽에만 치우친 사고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청복=깊은 산중에 살면서 산승이나 선인들과 서로 왕래하며 세월이 오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삶을 즐겨 조야의 치란을 듣지 않는 것.
*열복=외직으로 나가서는 대장기를 세우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초헌을 타고 대궐에 출입해 묘당에 앉아서 사방의 정책을 듣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