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채연 (cypark4306@skkuw.com)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김애란 작가의 잊기 좋은 이름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는 이전 원고를 오랜만에 다시 읽고, 고치고, 버리다 ‘이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동안 그를 스쳐 간 사람의 이름, 풍경의 이름, 사건의 이름을 말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그는 눈부신 순간들을 만났다고, 그 이름과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신문사에서 보낸 기나긴 시간을 매듭지으며 나도 잊기 좋은,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첫 번째 이름, 부사(副詞)와 인사
신문사에 막 들어왔을 때 고치기 힘들었던 버릇이 있다. 글을 쓸 때 아무 생각 없이 부사를 끼워 쓰는 것이다. 부사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냥 ‘그는 이것을 강조했다’라고 쓰면 될 것을 ‘그는 이것을 매우 열심히 강조했다’라고 쓰는 식이었다. 정말 인터뷰이가 매우 열심히 강조한 것 같아 그렇게 쓴 건데, 선배 기자는 부사 하나하나에도 기자의 가치관이 개입돼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김 작가 역시 부사 안에는 ‘이것! 저것!’하고 무언가 가리키는 다급한 헛손가락질의 흔적이 담겨있다며, 부사는 설명보다는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 때문에 지적을 받은 후, 기자로서 부사를 쓰는 것에 ‘퍽’ 소심해졌다. 문장을 쓰다가도 부사를 쓰기 전에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지우다가, 또다시 쓰는 일을 반복했다. 혹시라도 진실을 왜곡할까, 인터뷰이의 말을 정확히 전하지 못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장장 2년 동안 부사를 쓰는데 소심했지만, 오늘은 지면에 실리는 나의 마지막 칼럼이니 맘껏 써보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성대신문을 ‘제일, 꽤, 가장, 퍽, 무척, 왠지, 매우’ 좋아한다. 기자가 된 후 이렇게 많은 부사들을 아무 생각 없이 써보는 건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무척’ 행복하다.
 

두 번째 이름, 포스트잇
자신이 이해하기 귀찮거나 불편한 존재는 깎아내리기 쉽다. 하지만 반대의 움직임도 세상 곳곳에는 존재한다. 김 작가에게는 강남역과 구의역, 그리고 안산 임시 분향소에 붙은 포스트잇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거기 적힌 말들은 나와 타자를 중심과 바깥,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지 않는 말이었다고 한다. 당신은 나이고, 과거의 나이자 미래의 나라고, 누구든 그렇게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언어였던 것이다.
기사도 따뜻한 노란색 포스트잇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부 기자로 있으면서 난민문제, 낙태법, 김용균 법, 주 52시간 근무제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사에 담아왔다. 언제나 ‘공정’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기사를 썼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더 중요한 것은 ‘이해’였던 것 같다. 피해자나 문제 당사자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법안을 조목조목 살펴봤으며, 어떻게 하면 나와 그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지 그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기사를 마쳤다. 얇은 종이에 인쇄된 내 기사들이 포스트잇처럼 쌓여 나와 같은 무게를 지닌 타자를 도울 수 있었기를 바라본다. 또 앞으로 성대신문의 지면에 실리는 모든 기사가 꼭 포스트잇처럼 따뜻하기를.
 

박채연 부편집장
박채연 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