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기황 편집장 (rlghkd791@skkuw.com)

뮤지션 설리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연이어 동료 구하라도 세상을 등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든 한 명의 사람이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 대해 존중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죽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한 일간지에 이들의 죽음을 분석하는 기사가 올라왔다. “구하라·설리 사망, 연쇄살인…男, 여성혐오 성찰해야”라는 자극적인 제목에서조차 그들의 죽음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기사의 핵심은 결국 한국 사회 내 여성혐오가 심각하며, 그들을 향한 악성 댓글의 기저에는 여성혐오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그저 한국 사회 내 심각한 여성혐오를 알리는 근거로만 이용됐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묘는 젠더 갈등의 전쟁터가 됐고, 그들의 죽음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사용됐다.

기사의 핵심 개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 기사는 젠더 프레임과 성차별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됐을 것이다. 그래서 되묻고 싶다. 한 사람의 죽음조차 존중하지 않고서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가. 더 나은 사회가 구현되더라도 그 사회가 정녕 정의로운 사회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는 비단 특정인 혹은 특정 세력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듯하다. 죽음을 조롱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운지’ 혹은 ‘재기’라는 말이다. 이 단어들은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남성연대 성재기 상임대표의 죽음을 비하하고 희화화한다. 죽음을 한낱 유희 거리로 이용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삶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비유하자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작품을 그려가는 과정이고, 죽음은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라는 작품이 완성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용하고 조롱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이용하고 조롱하는 행위다.

죽은 자에 대해 존중을 하지 않는 것은 산 자를 모욕하는 것보다 더욱더 악질적이다. 죽은 자는 무력하다. 죽은 자는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고, 아무런 변호도 할 수 없다. 산 자에게는 다시 기회가 돌아오지만 죽은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우리는 죽은 자를 항상 존중해야 한다.

개인의 존엄성은 최대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 누구도 개인의 존엄성을 하찮게 여길 권리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산 사람의 존엄성 혹은 인권에 대해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들의 존엄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기에, 죽음에 대한 존중이 결국 살아있는 이의 존엄성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피와 얼룩으로 더럽혀진 무덤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 더 나은 사회 혹은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한다는 미명하에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품을 만들기에 더 좋은 환경을 구성하려고 다른 이들의 완성된 작품을 이용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역설적인 행위인가!

박기황 편집장
박기황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