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선정 (sunxxy@naver.com)

넓은 세상 볼 수 있는 안경이지만 눈 가려선 안 돼
좋은 이야기 들려주려면 어른들의 노력 필요

어릴 적 부모님이 주인공 흉내를 내며 들려준 동화는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재밌었다. 괴테는 “내가 인생의 불변 법칙을 배우게 된 것은 슈트라우스베르그 대학의 학창에서가 아니라 어릴 때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 속에서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동화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매체다. 하지만 동화에 몰입하면 자칫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넓고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동화, 사회로 가는 문을 열어주다
동화는 말 그대로 ‘아동을 위한 이야기’를 지칭한다. 동화는 △노래 △애니메이션 △영화 △책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775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핑크퐁’ 채널의 동화 영상은 각각 100만 회 이상 조회됐으며 전래동화 모음 영상은 누적 조회 수 1472만 회를 기록했다. 디즈니 영화 <신데렐라>는 할리우드에서 지난 2015년 실사화됐으며, 2021년에는 뮤지컬 버전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매체가 달라져도 동화는 여전히 전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다.

또한 동화는 아동기 사회화의 수단이기도 하다. 동화에는 새로운 가상 인물이 등장해 낯선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나우 아동발달심리 연구소 김서현 소장은“동화는 아동이 부모 외에 만나는 첫 번째 외부자극이고 간단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좋아하고 교육 효과가 크다”고 했다. 하지만 동화는 아동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요인을 동반한다. 과거의 동화는 현재 공유하는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훈적 가치가 크다고 여겨졌던 전래동화는 권선징악 구조와 가부장적 시각이 강조돼 아동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때로는 반쪽짜리 교육을 한다는 우려
아동은 주변 환경을 빠르게 흡수하는 만큼 동화 속 인물과 줄거리를 내면화하기 쉽다. 김 소장은 “3세가 되면 어렴풋이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게 되고, 5세부터 7세쯤엔 자신의 성별을 인식하는 성별 정체감을 형성하고 자신의 성역할을 따르려고 하는 성 항상성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아동에게 동화를 읽어준다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동이 고정관념을 그대로 학습해 자신의 성 정체성 형성과 성역할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래동화에서 남성 주인공은 주로 용맹하게 맞서 고난을 극복하고 여성 인물을 구해낸다. 영웅적 서사의 과정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부수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남성 주인공은 주로 집밖에서 활동하고 여성 주인공은 집 안에서 가사 활동을 하는 등 전형적 성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성별에 의한 것처럼 두드러지면 아동은 이를 고정된 요소로 인식할 수 있다. 김 소장은 “특정 행동이 지속해서 한쪽 성에만 나타나면 아동이 성별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억제하고 한정하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를 드러냈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기면 아동의 재능과 능력의 발달을 제한할 수 있다.

동화에선 여성의 외모와 착한 성격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한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예쁜 소녀가 살았다’처럼 여성 등장인물의 성격을 얌전하고 착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계모나 새언니가 등장하면 ‘심술보가 붙었다’고 수식하고 얼굴은 못생기게 그린다. 대표적으로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에서 볼 수 있는 악녀 설정이다. 김 소장은 이런 장면을 보고 “아동이 착하고 아름다워야 사랑받고 좋은 환경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외모를 인물의 지위나 성격에 연결하는 것 외에도 선행을 베푼 주인공이 예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일종의 보상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재미를 위해 꾸며진 요소이며 현실과 다르다고 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은 동화 속 인물의 행위를 따라하며 특정 행동에 정당성을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영상매체로도 동화가 활발히 보급되는 것에 대해 김 소장은 “영상은 시각적 효과가 강해 아동에게 더 자극적이고 빠르게 흡수된다”고 설명했다. ‘뽀로로’에서 여자로 표현되는 캐릭터는 분홍색으로 나타나며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한다. 포털 사이트에 ‘동화’를 검색하면 상위에 뜨는 영상에서도 화려한 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공주를 볼 수 있다. 성별이 정해지지 않은 자동차 캐릭터가 등장해도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표현된다. 월산 초등학교 오수정 교사는 “미술 시간에 색종이를 나눠줄 때 대부분 남학생은 파랑, 여학생을 분홍을 선택한다”며 “요즘은 학교에서 고정관념을 없애고자 노력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이런 편견이 생겨난 것 같다”고 전했다.
 

고정관념을 비틀기 위한 움직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6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성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는 동화를 퇴출하기도 했다. 학교가 동화 속 등장인물의 대사나 역할 등을 검토해 ‘빨간 모자',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동화를 도서관에서  제외했다. 국내에서도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여성가족부는 영유아기부터 자연스럽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성 인지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을 펼치고 있다. △공존 △다양성 △자기 긍정을 지향하는 ‘나다움 어린이책'은 남자답게 여자답게가 아닌 '나답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책이다. 선정된 책에는 여자아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격렬하게 경기를 치르거나 뜨개질을 하며 옷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책 속에서 자신이 다른 남자아이와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고민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좋아하는 게 다른 아이들과 다를 뿐이지, 넌 엄마 아빠의 훌륭한 아들이야. 우리는 네가 아주 자랑스럽단다”라고 말해준다.
 

파랑· 분홍으로 물들이지 않으려면
김 소장은 동화 속 성 고정관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동에게 성별 상관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TV 프로그램에 연령 제한이 있는 이유는 특정 연령 이하는 보호자의 지도가 필요해서다. 부적절한 장면이 나오면 왜 잘못됐는지 설명해주거나 아이의 질문에 대답해줘야 하기 때문”이라며 “동화도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매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보호자의 적절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인천대 국어교육과 우신영 교수는 “동화 속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요소보다는 교육적 매개나 개입 없이 그대로 아동에게 수용되는 경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동화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인 동시에 결국 어른이 만드는 이야기다. 동화 속엔 어른이 공유하는 사회의 가치관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성 고정관념을 전달하지 않으려면 “교육자가 자신이 가진 성관념을 자성하고 대화하며 조정해 성숙한 안목을 지니고 아동에게 탐구 활동이나 비판적 해석과 함께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 인지 감수성=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하며,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낼 대안을 찾아내는 능력까지도 포함한다.

ⓒ유튜브 '뽀로로' 채널캡처
ⓒ유튜브 '핑크퐁' 채널 캡처
ⓒ유튜브 '핑크퐁' 채널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