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민정 (0614smj@naver.com)

엘리트체육과 군기문화가 학교폭력 부풀려
운동과 학습, 기울어진 저울에 균형 맞춰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함.’ 지난해 실시된 ‘초·중·고 학생선수 인권실태 전수조사’에서 신체폭력을 경험한 초등학생 선수의 38.7%가 느낀 감정이다. 학교 운동부 학생들의 폭력 경험은 일반 학생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학교 운동부 학생들은 학교폭력에 취약한 환경에서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사실상 운동부 학생들은 학교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무엇이 그들을 폭력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걸까.

학교 운동부의 고질적인 학교폭력
학교 운동부는 1980년대부터 학교폭력의 온상이었다. 2000년대 초반 무리한 체중감량 유도로 인한 학생선수 사망, 선배들의 구타로 인한 학생선수의 전신 마비 등의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학교 운동부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심석희 선수 미투 사건’을 시작으로 스포츠계 폭행 사건이 연달아 논란이 되며 학창 시절부터 이어지는 체육계의 고질적인 폭력 문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을 출범시켜 총 6만 3211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초·중·고 학생선수 인권실태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학교 운동부 학생들의 인권침해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의 피해 사례는 성폭력 2212명, 신체폭력 8440명, 언어폭력 9035명으로 밝혀졌다.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학교폭력의 주체는 지도자에서 선배나 또래로 변화했다. 이는 학생선수가 유년 시절부터 반복된 폭력을 내면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폐쇄적 환경과 엘리트체육이 탄생시킨 학교폭력
학교 운동부의 폐쇄적인 환경은 폭력을 부추기는 주요한 요인이다. 학교 운동부는 훈련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스마트폰을 압수하고 잦은 합숙 훈련을 진행한다. 운동부 학생들은 외부와 단절되며 주로 훈련이나 합숙 과정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한다.

어른들의 동조와 묵인도 학교폭력 조장에 일조한다. 학교 운동부에서 대부분의 폭력은 기합의 형태로 이뤄진다. 운동부 내부의 군기를 중시하는 지도자의 행위는 기합을 통한 폭력을 부추길 수 있다. 실제로 2018년 대전의 한 사립학교에서 기합을 명목으로 지도자가 학생들을 폭행하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선배 집단이 후배 집단을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부모도 학교폭력 방조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초·중·고 학생선수 인권실태 전수조사’와 함께 진행된 심층 인터뷰에서 초등학생 수영선수는 “엄마는 제가 수영하는 걸 보러 오셔서는 맞는 것도 보신다”며 “엄마는 다음부터는 맞지 않도록 똑바로 잘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체육계 학교폭력이 일상화된 배경에는 실적을 최우선순위로 두는 엘리트체육 정책이 있다.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된 엘리트체육 정책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해 본격화됐다. 이 같은 정책으로 우리나라는 스포츠 강국으로 거듭났으나 스포츠계 폭력 문화 또한 본격화됐다. 이에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체육계성폭력 근절대책 당정협의회에서 학교 운동부의 폭력 문제에 대해 “체육계의 폐쇄적인 문화는 물론 금메달 만능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며 폭력의 근본적인 근절을 위해서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것은 물론이고 엘리트 위주의 선수 육성 및 교육 방식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인이 돼도 끊어지지 않는 학교폭력의 굴레
체육계 학교폭력은 대학의 군기 문화와 만나 더욱 심각해진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대학교 운동선수 인권실태 조사결과’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초·중·고·대학을 통틀어 대학 운동선수의 폭행 피해가 가장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대학교 운동선수가 경험한 언어폭력 31%, 신체폭력 33%, 성폭력 9.6%는 모두 초·중·고 학생선수 폭력 경험의 2배를 훌쩍 넘기는 비율이다. 학창 시절부터 폭력이 일상 깊숙이 자리 잡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고도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다. 폭력은 끝없이 대물림돼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며 군기 문화에 의해 정당화된다.

 
현실의 벽 앞에 선 체육혁신
체육계의 폐단을 척결하기 위해 스포츠혁신위원회는 체육혁신 권고안을 내놓았다. 그 중 지난해 6월에 발표된 제2차 권고안에 학교 운동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스포츠혁신위원회는 스포츠 인권침해의 구조적 원인이 학교 스포츠의 비정상에 있다고 여겼다. 소수의 학생선수는 운동과잉과 학습결렬을 경험하고 있고 반대로 다수의 일반 학생은 학습과잉과 운동결렬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2차 권고안에는 △일반 학생의 스포츠참여 활성화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개편 △체육특기자 진학제도 개편 △학교운동부 운영규정 개선 △학교운동부 지도자 처우개선 △학생선수 학습권 보장 총 6가지 핵심 내용과 35개 세부과제가 담겨있다. 세부과제에는 폭력의 온상이었던 합숙소 전면 폐지, 엘리트주의를 완화하기 위한 주중 훈련시간 및 휴식시간 규정 마련, 혹서기 혹한기 대회 개최 및 훈련 최소화 등이 포함돼 있다.

대학운동부를 운영하는 전국 대학 협의체인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는 대학스포츠와 스포츠 혁신은 함께 가야 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게시하며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이 완벽한 해법은 아니지만, 학생선수의 최소한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유예할 수는 없다며 오래된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한편 스포츠계 혁신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대한체육회는 대부분의 권고안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개편, 주중대회 개최 금지 등이 메달을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며 우려를 표했다. 다수의 체육계 인사들이 이에 뜻을 같이했으며 한국중고등학교탁구연맹 손범규 회장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2차 권고안 철회를 요청하는 청원을 하기도 했다. 체육계 혁신의 바람이 운동부 내의 학교폭력을 뿌리 뽑을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