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민주 기자 (minju0053@skkuw.com)

어려워진 현실에 과거로 눈 돌려
세대 간 공감을 도와
새로운 문화 순환 생태계 탄생

‘나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영원한 행복을 꿈꾸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꿈 같진 않아도 너만 있어 주면 돼.’ 흘러간 옛 유행곡은 드라마 속에서 리메이크돼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오래전 대학가를 활보하던 나팔바지는 21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 부츠컷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여전히 그곳을 걷고 있다. 이처럼 추억으로 묻혔던 과거는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현재로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른바 레트로다. 왜 우리는 레트로에 열광하며 과거를 그리워하고 사랑할까. 

과거를 회고하고 재현하는 레트로
레트로(Retro)란 회상, 회고를 뜻하는 영단어 레트로스펙트(Retrospect)의 줄임말로, 과거를 그리워하며 과거의 유행을 다시 가져오려는 문화 현상을 말한다. 비슷하게 과거의 스타일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빈티지’가 있다. 빈티지는 본래 와인의 생산연도를 나타내는 말로, 과거에 생산돼 오래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거나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레트로는 과거의 스타일을 현재에 맞춰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와 구분된다. 과거에 생산된 청바지는 빈티지이지만, 과거 디자인을 빌려 새롭게 출시된 청바지는 레트로다.

 
레트로 현상 이전, 근대에도 과거로 돌아가려는 문화적 움직임은 있었다. 18세기 말에는 고대 그리스·로마를 동경하는 신고전주의가 부상했고, 이후 고대를 벗어나 중세를 그리워하는 낭만주의 열풍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흐름은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인 레트로로 변모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 중 절충주의는 레트로를 구성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작용한다. 절충주의는 다양한 시대적 근원에서 유용한 것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기술로, 퓨전된 문화 현상을 재창출한다. 이에 1970년대 패션계에서 처음으로 ‘레트로’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71년 이브 생 로랑은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패션 스타일에서 유래된 ‘40년대’ 컬렉션을 발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노스탤지어, 그리움을 생각하다
1970년대 이후 패션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분야에도 레트로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요즘은 레트로를 활용한 ‘레트로 마케팅’이 대세다. 이러한 배경에는 노스탤지어(Nostalgia)가 숨어 있다. 노스탤지어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뜻하는 용어로, 1688년 산속에 주둔한 스위스 용병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하기 위해 탄생했다. 노스탤지어는 부정적 감정을 희석하고 긍정적 감정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때문에 노스탤지어를 다룬 문화 작품도 꾸준히 창작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은 노스탤지어에 젖어 지나간 20세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그린다. 작중 짱구(노하라 신노스케)의 아버지 신형만(노하라 히로시)은 과거를 상징하는 ‘옛날 냄새’에 사로잡혀 예전처럼 어린아이가 되기를 꿈꾼 나머지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1세기에도 왜 레트로는 계속될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과거를 다룬 영화 <써니>,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등이 크게 흥행했다. 이처럼 현재의 삶이 어려워질수록 레트로는 더욱 각광받는다. 불완전한 현재는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익숙한 것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레트로토피아에서 대중들이 과거를 찾는 이유에 대해 “추정된 안정성과 그로 인한 신뢰성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과거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금의 디지털 문화에는 과거 아날로그가 가진 인간적임과 따뜻함이 결핍돼 현실 속 개인의 무력함을 키운다. 레트로 부흥은 만연해진 디지털 문화에서도 비롯되는 것이다.
한편 기술과 매체의 발달은 레트로가 과거에 한층 더 쉽게 접근하게 만든다. 아카이브와 저장매체가 발달하면서 과거는 객관적이면서 손쉽게 저장하고 꺼내 볼 수 있는 존재가 됐다.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그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서 “수많은 정보로 가득한 웹에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치면 엄청난 양의 과거를 찾을 수 있다”며 “이런 과거는 잊거나 침잠돼 있던 인간의 저장 기억을 깨우게 돼 다양한 복고 문화 콘텐츠로 재현된다”고 말했다.

 
레트로의 명암
레트로 콘텐츠가 흥행하면서 과거를 직접 경험했던 예전 세대와 콘텐츠를 통해 새로 과거를 접하는 세대 사이의 공통적인 문화 코드가 만들어진다. 이는 세대 간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져 사회 통합의 결과를 낸다. 또한 레트로는 사람들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콘텐츠 제작사 레드브로스 문동열 대표는 “레트로는 사람들이 보다 인간적으로 타인과 사회를 대할 수 있는 정서적인 근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레트로는 이미 존재하는 콘텐츠를 재활용하면서 흥행 여부에 따른 기업의 리스크가 감소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레트로가 아우르는 세대가 확장되면서 관련된 시장 크기도 커진다.

하지만 오로지 과거에 국한돼 과도한 과거 지향적 문화 콘텐츠를 추구할 경우, 콘텐츠의 질이 하락할 수 있다. 창의성은 문화의 발전을 위해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문 대표는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가 현재의 콘텐츠 산업을 만들었다”며 “레트로에 의지하더라도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를 게을리 한다면 산업적으로는 퇴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더불어 레트로에 수반되는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은 과거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을 어렵게 할 수 있다.

레트로는 발전을 거듭하며 뉴트로(Newtro)라는 새로운 문화 현상을 낳기도 했다. 이에 문 대표는 “과거 세대는 문화적으로 단절돼 콘텐츠 공유가 힘들었지만 지금의 세대는 세대 간 공감이 이뤄지기에 충분한 문화 경험을 가지고 있다”며 “이러한 문화의 재생산을 통해 문화 형태의 순환 생태계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레트로의 미래를 예측했다.

 
*오트 쿠튀르=파리 의상 조합에서 지정한 기준에 맞는 규모와 조건을 갖춘 의상 제작점. 파리 의상 조합에서 개최하는 오트 쿠뤼르 패션쇼는 최신 패션 흐름을 선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므두셀라 증후군=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